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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에A의 역사

아르미셸 2010. 3. 20. 20:01

제노아의 시대

Lega Calcio marchio.png

1893년 9월 7일, 이탈리아 최초의 축구팀 제노아가 만들어진 이후 19세기의 마지막 10년간 토리노(1894), 운디네세(1896), 유벤투스(1897), 밀란(1899) 등 오늘날까지 유명한 여러 팀들이 태어났다.

이탈리아에는 거의 중세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칼치오의 전통이 있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전파된 축구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 중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된 북서부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898년 3월 16일,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결성되고 같은해 토너먼트 형식의 전 이탈리아 챔피언쉽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축구는 20세기를 맞이한다.

이탈리아 챔피언쉽 첫 대회는 하루만에 끝나는 대회로 각지역 대표들이 출전한 최초의 전국급 대회에서 우승한 제노아는 3회 대회까지 연속재패를 달성하면서 명실공히 이탈리아 최강의 축구클럽으로 떠올랐다. 허버트 키플링이 지휘하는 AC 밀란이 1901년에 처음으로 우승하면서 제노아의 독주를 막아내었지만 제노바는 그 후에도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연속제패를 달성한다.

 

제노아 1898

이 대회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1905년부터 조별 예선을 추가해서 시합 수를 늘렸고 이 때문에 선수층이 얇았던 제노아 대신 유벤투스가 우승을 가져갔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축구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스위스와 독일계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는 밀란이 1906년과 1907년 우승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밀란 1901

자국화

FIF가 축구리그에서 그동안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외국인 선수들을 배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탈리아의 축구는 급변하게 된다. 이 결정은 어떤 의미로는 이탈리아 축구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고 축구 문화를 이탈리아에 정착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많은 축구 클럽들은 이 결정에 반발했고 선수들은 이탈리아를 떠나갔다. 새로 설립된 프로 베르셀리가 이 상황을 이용해 대회를 연속 재패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일부 클럽들은 대회 참가 자체를 거부했고 일부 클럽은 자국화에 찬동하는 선수들과 반대하는 선수들로 분리되는 등 진통이 계속되었다.(AC 밀란에서 인터밀란이 분리되었다.) 결국 FIGC로 개칭한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1909~1910 시즌에 다시 외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보다 단순한 형태로 챔피언쉽의 제도를 수정했다.

인테르 1910(첫우승)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지역간의 입장차이로 저변 확대가 지지부진하던 챔피언쉽을 이탈리아 북서부의 대회에서 중부와 남부, 서부를 포괄하는 전국 규모의 대회로 서서히 확대시켜갔고 점차 조직을 체계화 시켜나갔으며 팀을 수준에 따라 1부와 2부로 분리하면서 점점 챔피언쉽의 인기를 끌어올렸지만 마침 닥쳐온 1차대전으로 이탈리아 축구의 발전은 일시 중단되었다.

1부 리그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리그가 재개되었지만 각 지역별로 나누어진 구조 때문에 대회는 지극히 복잡했고 각 팀은 쓸데없는 경기를 수없이 치러야 했다. 훗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될 축구광 빅토리오 포초는 이탈리아 축구계가 잉글랜드 처럼 최고 수준팀들이 대회에서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리그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클럽들이 분리되면서 이탈리아 축구계는 장기간 혼란에 빠졌다. 오랜 진통을 겪고난 1928년 여름에 이탈리아 축구협회장 레안드로 아르피나티는 실력에 따라 각 팀을 세리에 A와 B로 분류해 새로운 리그를 만들었다.

 

빅토리오 포초

한편, 1926년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절대적 독재자로 등장하면서 축구도 파시즘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원래 파시스트들은 잉글랜드 적인 축구보다 볼라타라는 이탈리아의 구기를 새로 창안하고 싶었지만 이미 축구는 이탈리아의 국기처럼 된 상태였고 결국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은 축구를 보다 이탈리아화 하는데 착수했다. AC 밀란을 밀라노로, 제노아93은 제노바93으로, 인테르밀란을 암브로시아노인테르로 개명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매번 축구경기를 시작할 때마다 선수들은 파시스트 식 경례를 하도록 의무화되었고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경기장들을 건설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재계도 축구에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1923년 7월 24일, 피아트 자동차 사장 에드와르도 아그넬리가 유벤투스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었다. 유벤투스는 ‘은행’이라고 불릴정도로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1930년 여름 유벤투스는 알레산드로 코치 카를로 카르카노를 영입하면서 유벤투스 제국을 구축해나간 끝에 제노아, 로마, 볼로냐, 인터밀란 등을 물리치고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했다.(만약 2009~2010 시즌에 인터밀란이 우승한다면 사상 2번째로 2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유벤투스 1931

유벤투스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축구협회장 레안드로 아르피나티가 지지하는 볼로냐는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컵에서도 위력을 과시했다. 빅토리오 포초 감독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월드컵 재패를 비롯해 이탈리아 축구는 세계 최고의 위치를 노려보게 된다.

위대한 토리노

이탈리아 축구는 라디오의 발달로 더더욱 넓은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정, 재계의 후원으로 급격히 실력을 향상시켰지만 전쟁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세계를 불태웠던 2차대전이 끝나고 세리에가 재개되면서 리그를 지배한 것은 토리노였다.

 

그란 토리노

42~43 시즌에 베네치아에서 미드필더 발렌티노 마졸라를 영입한 토리노는 이 위대한 선수를 중심으로 전후 세리에를 지배하며 4연패를 달성한다. 특히 47~48시즌에는 40경기에서 29승 7무 4패의 성적을 거두어 2위인 AC 밀란과 승점차를 무려 16점이나 벌리고 시즌 125골 기록을 남기는 등 오늘날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고 기록을 남기며 ‘위대한 토리노’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48~49시즌 토리노는 지역 라이벌 유벤투스의 5연패 기록에 도전하며 4경기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4점차로 앞서 5연패 타이 기록(1942~43 시즌 우승 이후 45~49시즌, 1944년에는 스페치아 칼치오가 우승했지만 전쟁으로 리그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우승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을 눈앞에 두었지만 49년 5월 3일, 리스본에서의 자선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탑승한 1군 멤버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맞이했다.

수페르가 참사 위령탑

세리에 A사상 최강의 팀은 덧없이 사라졌고 토리노는 더 이상 리그 최강을 노릴 수 없는 약소팀으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 대표팀도 부동의 주장 마졸라를 잃어버렸다.

세 여왕의 시대

토리노의 비극은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에서 과거의 강호들을 대신할 새로운 강호들의 등장을 알리는 전환점이 된다. 이 사건 이후로 카사 아넬리의 유벤투스와 밀라노의 양대 강팀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리그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귄나르 노르달. 6시즌을 뛰면서 5시즌 연속 득점왕을 달성한 AC 밀란의 득점왕

49~50시즌에 포스트 토리노 시대의 첫 스쿠데토를 차지한 것은 유벤투스였지만 스웨덴의 그레노리 삼총사를 영입한 AC 밀란은 5년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귄나르 노르달의 활약에 힘입어 44년만(1916년의 우승은 전쟁으로 비공인)의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55~56 시즌에 피오렌티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이후 유벤투스와 밀란에 눌려 4년 연속 준우승이라는 달갑지 않은 기록을 세우며 뒤로 밀려났다.

존 찰스 1958년 유벤투스 10회 우승 멤버

유벤투스는 58년에 10회우승을 달성하면서 움베르토 아그넬리의 제안에 따라 배지와 유니폼에 별(Stella d’Oro al Merito Sprotivo)을 달 수 있는 명예를 얻었으며 인테르는 안드레아 리졸리 구단주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헬레니오 헤레라 감독의 용병술에 힘입어 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62~63년에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동시에 석권하는 등 ‘위대한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다.

헬레니오 헤레라와 마졸라.

변화와 고립

그러나 같은 시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초라했다. 34년과 38년에 2회 연속 우승을 거머쥔 이탈리아였지만 1950년이래 2년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탈락한 것은 수페르가 사고로 ‘위대한 토리노’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이 한꺼번에 스러졌기 때문이라고 한다해도 1958년에서는 예선탈락, 1962년에는 칠레에게 패해서 1라운드 탈락을 당하는 등 번번히 16강도 넘어서지 못하는 부진이 이어지자 이탈리아는 그 원인을 세리에 A에 너무 많은 용병선수들이 뛰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78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대표팀의 능력 강화를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탈리아는 세리에 A의 국적조건을 강화했다.

한편 전술적인 면에서 이탈리아는 수비적인 전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칼치오의 전통에 따라 전술과 팀플레이에 집중해온 이탈리아에서는 항상 선진적인 전술들이 등장했고 토리노는 1958년의 브라질 대표팀보다 10년 먼저 4-2-4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60년대 이후 세리에 A는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수비전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인테르의 헬레니오 헤레라가 5-3-2를 사용했고 AC 밀란의 네레오 로코는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였다.(카테나치오 전술은 1930~40년대 스위스 대표팀 코치 칼 라판이 창시했고 네레오 로코가 50년대 파도바 감독 시절에 다듬어졌다.) 이탈리아 팀들은 1962~63 시즌부터 64~65시즌까지 UEFA 챔스리그 결승전을 독점하다 시피했지만 이후 84~85시즌에 유벤투스가 우승하기 까지 거의 20년간 클럽축구의 최정상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유벤투스의 철벽 수문장 디노 조프

60년대가 유벤투스-AC 밀란-인테르의 시대였다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벤투스는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의 지휘아래 순조롭게 우승경력을 늘려나갔지만 AC 밀란은 67~68시즌 이후 10년간 스쿠데토를 차지하지 못하다가 78~79시즌에야 유니폼에 별을 새겨넣을 수 있었고 79~80 시즌에는 경기조작 혐의로 세리에 B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비록 1년만에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기는 했지만 81~82시즌에 겨우 7승을 기록하면서 다시 세리에B로 강등되는 등 이 시기는 AC 밀란에게 그다지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다.

베를루스코니 시대

1982년 이탈리아가 세번째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10년간 계속되어왔던 외국인 보유제한이 풀리면서 세리에의 위상은 급격히 상승한다. 마침 경기조작 스캔들에 흔들리던 분데스리가와 헤이젤 참사로 5년간 유럽무대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잉글랜드 등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해 세리에A에는 전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나폴리는 1984년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그 전에 FC 바르셀로나를 거쳤다) 한 천재에게 클럽의 명운을 걸면서 급부상을 이루었다. 마라도나는 카레카, 시로 페라라 등과 함께 나폴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만년 중하위팀이던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팀으로서는 처음으로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일세를 풍미한 세리에A의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나폴리 1987년. 아랫줄 왼쪽 세번째가 디에고 마라도나

한편 1986년 베를루스코니는 두차례의 강등으로 경영난에 빠진 AC 밀란을 인수하고 당시에는 거의 무명이었던 아리고 사키 감독을 영입하면서 밀란의 황금기를 열었다. 반바스텐, 루드굴리트, 레이카르트로 구성된 네덜란드 트리오를 영입하면서 AC 밀란의 토털사커는 1989년, 1990년 UEFA 챔스 2연패를 이어가는 등(90~91 시즌 챔스 준준결승에서 마르세유와의 경기중에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조명이 꺼지자 AC 밀란은 경기 진행을 거부해 몰수패를 당하고 1년간 출전금지 조치를 당했다.)

아리고 사키 감독 

아리고 사키 감독의 뒤를 이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파올로 말디니, 알베르티니, 알레산드로를 중심으로 세리에A 무패우승을 포함한 3연패, UEFA챔스 연속 결승진출 등등의 화려한 성적을 쌓아올리며 ‘그랑 밀라노’, ‘라 인빈시빌리’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같은 시기에 인테르는 아직도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유벤투스는 그동안 부진하던 UEFA 챔스에서 두번의 우승을 거두는 등 세리에A는 유럽 최강의 리그로 거듭나게 된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

7공주 시대

1990년대 초반까지 세리에A는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의 빅3와 삼프도리아, 나폴리, 토리노, 피오렌티나, 로마, 라치오, 볼로냐, 제노아 등의 중견명문클럽들과 그 이하 라는 3단계 구조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위성유료방송의 보급으로 축구가 급격히 발전하고 보스만 판결로 외국인 선수 영입이 탄력을 받으면서 세계의 축구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세리에A에서도 볼로냐, 나폴리, 토리노, 제노아 등 전통있는 명문팀들이 강등되면서 중간그룹에서 성장한 그룹들과 몰락한 그룹이 뚜렷해지면서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 라치오, AS 로마, 파르마, 피오렌티나가 모두 스쿠데토를 노리는 이른바 7공주 시대가 열렸다.

칼치오 비즈니스의 급격한 증가로 신흥 명문들은 과감하게 팀의 전력을 강화하자 세리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해나갔고 파올로 말디니, 루이 코스타, 클루이베르트, 호나우도, 에르난 크레스포, 델 피에로, 비에리, 지단, 인자기, 네스타, 네드베드, 토티, 카푸, 바티스투타, 부폰 등등 손꼽히는 명선수들의 경연장이 되었고 UEFA우승보다 스쿠데토 획득이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유벤투스의 상징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라치오의 알레산드로 네스타

 

밀란시절의 별명첸코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칼치오 버블이 꺼지고 과잉 투자와 방만한 관리로 클럽들의 부실한 재정상태가 밝혀지자 기존의 빅3를 제외한 클럽들은 경영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피오렌티나는 체키 고리가 주력 선수 매각을 거쳐 2002년에 파산하면서 3부리그 까지 추락했고 라치오는 모기업의 영향으로 파산직전에 몰렸다. 파르마는 2003년 파르마랏토의 분식 회계 사건을 계기로 부실 채권을 떠맡았으며 로마도 센시 회장 아래 거액의 부채를 짊어지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결국 주력 선수를 전부 매각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클럽 재건에 매진하고 있다. 삼프도리아, 토리노, 나폴리, 제노아 등의 옛 명문들도 재건에 나서 다시 3층 구조를 이뤄가는 중에 있다.

칼치오폴리

첫 발단은 이탈리아 검찰이 유벤투스 단장 모지의 아들 알레산드로 모지가 운영하는 GEA World와 나폴리의 관계를 조사하는 중, 04~05시즌에 유벤투스의 루치아노 모기가 축구심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녹취기록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에도 세리에 A에서는 승부조작 사건이 물의를 빚었지만 이번의 조사에서는 더욱 거대한 규모의 승부조작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칼치오폴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져가면서 2006년 7월 4일,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공식적으로 세리에 A에서 승부조작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논란의 핵심에 있는 밀란, 피오렌티나, 유벤투스, 라치오 이상 4개 클럽에게 강등 조치를 내렸다. 유벤투스에게 내려진 처벌은 처음에는 세리에 C로의 강등이라는 유래없이 강력한 것이었지만 유벤투스의 항변이 받아들여져 결국은 세리에 B로의 강등과 05~06 시즌의 우승 기록 박탈 처분이 내려졌다. 레지나도 승점을 15점 감정당하는 등 최종적으로는 처벌이 상당부분 완화되었지만 이 사건은 7공주 시대의 붕괴로 흔들리던 세리에 A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흔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만해도 리그를 지배하던 유벤투스는 카나바로, 튀람, 즐라탄을 비롯한 핵심 멤버들을 줄줄이 상실했고 세리에 A 역사상 한번도 강등된 적이 없던 최고의 자리를 내줘야 했다. 06~07시즌에 UEFA 챔스에 출전할 팀은 인테르와 로마, 치보와 밀란이었고 팔레르모와 리보르노, 파르마가 UEFA 컵에 출전하면서 세리에 A의 위상은 추락하다 시피했다.

칼치오폴리는 유벤투스의 몰락과 AC 밀란의 부진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인테르에게는 대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리그 3위였던 인테르가 1위로 급부상했으며 비에라와 즐라탄을 뽑아오는 등 칼치오폴리의 최대 수혜자가 된 인테르가 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유벤투스 팬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2006년 9월, 텔레콤 이탈리아가 칼치오폴리 관련내용을 도청하는 과정에 인테르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입증되었다.

2007년에는 한층 더 나아가 칼치오폴리 자체가 허상에 불과하고 인테르가 경쟁팀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꾸민 음모라는 설이 제기되는 등, 아직도 칼치오폴리 사건은 진행중에 있으며 그동안 계속되어온 이탈리아 축구의 정계 및 재계 커넥션과 복표사업, 축구 비즈니스의 복잡한 관계가 얽히고 섥힌 비밀의 실타래는 완전히 드러나려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참고자료 및 사진출처

http://it.wikipedia.org/wiki/Serie_A

'축구의 역사' 빌 머레이

http://ja.wikipedia.org/wiki/%E3%82%BB%E3%83%AA%E3%82%A8A_(%E3%82%B5%E3%83%83%E3%82%AB%E3%8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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