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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1차 중동전과 팔레스타인 난민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70만 내지 75만명의 아랍계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주변국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이를 둘러싼 문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역사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과 상황은 오늘날까지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모든 분파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1951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를 이스라엘 국외에 711,000명, 이스라엘 국내에 16만명 정도로 추산했으며 오늘날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4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에 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초창기에는 ‘주변 국가의 명령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이 1차 중동전쟁 이전에 전투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려 한 것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는 주장과 ‘총검으로 위협을 받고 시오니스트이 교란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관련 문서가 공개되고 이스라엘 내각 회의 문서와 텔아비브 이스라엘 국방부와 기바타임 국방부 문서고가 기밀해제 되면서 1차 중동전쟁과 관련된 많은 사건에 관련된 새로운 자료가 밝혀졌고 이에 기초해 ‘신역사학’이 대두되었다. 베니 모리스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기원”을 비롯한 신역사학파의 연구로 팔레스타인 난민의 절반 가량은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비록 조직적인 명령에 의해서는 아니더라도 의도적으로 축출되었음이 밝혀졌다. 또 왈리드 칼리디와 일란 파페 등은 팔레스타인의 지지를 받는 학자들은 난민 축출이 명확한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1단계 (1947년 12월 ~ 1948년 3월)

1차 중동전에서 아랍측과 유대측 모두 폭력행위를 막으려 했지만 내전이 시작된 초창기에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베니 모리스는 이 시기를 아랍인이 시작한 폭력에 유대인이 보복하는 보복의 악순환이었다고 정의하지만 플라판은 강경파인 이르군과 레히의 아랍계에 대한 테러가 적대관계에 있던 유대 주류파와 하가나도 보복의 연쇄에 끌어들였다고 지적한다.

아랍계가 유대 정착지를 공격하면 유대계가 주변 아랍마을에 보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지만 유대인의 보복은 상대의 무장, 비무장 상태를 무시하고 가옥을 파괴하며 거주민을 축출하기 때문에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공포분위기와 교통망이 두절되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실업자가 증가했으며 후세이니가 농부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이 상황에서 몇몇 아랍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외국으로 보냈고 아랍 해방군이 군사거점을 확보하는 중에 몇몇 전방 마을에서 비전투원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아랍측의 인구 감소는 주로 하이파나 야파, 서 예루살렘처럼 유대인 거주지와 인접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아랍 사회에서 빈곤층은 주변 도시로 이주했고 부유층은 대부분 전쟁이 길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타국으로 도피했다. 1948년 3월 말까지 30개 마을에서 아랍인구가 이탈했으며 1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계 아랍인들이 가자나 브엘셰뱌, 하이파, 나자렛, 나블루스, 야파, 베들레헴 같은 아랍인 지역으로 이동했다. 지도자과 도시지역 중산층들은 가족들을  팔레스타인을 떠나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지로 도피시켰다. 3월 22일 경 주변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난민 중에 노약자와 여성 및 병자에 한해서 입국 비자를 발부하기로 합의했다.

1890년대 부터 몇몇 시오니스트의 주도한 계획에 의해 아랍계가 축출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시기에 이슈브가 아랍계의 축출을 지지한 적은 없으며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신생 이스라엘에 아랍계의 소수를 용인하려 했고 하가나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영국의 간섭을 피하려 했다. 1947년 12월 18일, 하가나는 1946년 5월에 작성된 “5월 계획(Tochnit Mai)”의 적극적 방어작전을 승인했고 이 계획에는 아랍계 도로망을 파괴하거나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가옥을 파괴하고 거주민을 축출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듬해 1월 초에 하가나는 자지르 작전(Operation Zarzir)을 통해 아민 알 후세이니와 제휴중인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그에 대한 비난을 아랍 지도자들에게 돌리려 했지만 배정된 자원의 부족으로 니미르 알 카티브만을 암살했다. 1948년 2월 19일에 하이파 남쪽의 키사랴에서 일어난 축출은 이슈브가 승인한 유일한 작전이었지만 하가나는 이후 정부 승인없이 몇개의 아랍공동체를 추가적으로 파괴했고 이르군은 이들을 쫓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시오니스트는 일련의 위협 작전을 실시해 ‘폭력적 정찰행동’을 개시했고 박격포가 확보되자 아랍계 마을과 주변지역을 포격했다. 일란 파페는 이시기에 하가나가 공세로 나서면서 보다 과격한 보복으로 정책이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긴 세미나’기간 중인 1948년 1월에 벤구리온은 보좌관들과 상황을 논의했지만 그 출발점은 최대한 많은 수의 아랍인들을 유대인 지역에서 축출하는 데 있었다. 회의를 통해 플렌 다렛이 계획되었고 1948년 2월에 있었던 일련의 아랍계 거점 공격은 계획의 토대가 되었고 인구밀집지대를 다루는 요령과 지침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차 중동전이 본격화되기 전에 팔레스타인 지휘부는 붕괴되었고 이후 국내의 아랍계는 산발적이고 지엽적인 저항만이 가능한 혼란에 빠졌다. 팔레스타인 법률고문 후세이니는 자원의 부족으로 이슈브에 대한 전면공세를 실시할 수 없게되자 소규모 습격을 지시하면서 경제적인 보이콧에 나섰다. 베니 모리스의 결론에 의하면 이 시기에 “아랍인들이 살던 곳을 떠나게 된 것은 대체로 유대인, 하가나와 이르군, 레히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공포감 때문이고 실제로 추방명령이나 강압적인 ‘조언’으로 이주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2단계(1948년 4월 ~ 1948년 6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 2주전에는 전체 아랍계 인구의 25%에 달하는 175,000명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있었다. 전투는 주로 예루살렘-텔아비브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이탈은 티베리우스, 하이파, 야파를 비롯한 해안지대의 유대인 지역에서 일어났다. 4월 초에는 데이르 야신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이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아랍계 사이에서는 공포가 확대되어갔다.

그와 함께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하이파의 아랍계가 집단으로 이주했고 역사가 에프라임 카르쉬에 의하면 하이파의 아랍계 절반 가까이가 1948년 4월 말에 마지막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떠났을 뿐 아니라 5,000~15,000명이 자발적으로 떠났고 남은 15,000~25,000명은 아랍 평의회의 지도를 따라 남도록 명령받았다. 카르쉬는 이를 근거로 유대인이 아랍계의 이주를 강요하는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심리적 전격전을 시도했다고 볼 수 없으며 하이파의 유대인 지도자 샤프티 레비 대령이나 하가나 모두 아랍인들이 남아있기를 바랬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연구는 4월 26일 하이파를 소개한 영국군의 치안 보고서에 기초한 것이다. 4월 26일은 유대인니 부대가 이미 하이파를 점령하고 아랍계가 도시를 떠난 뒤로 4일 전인 22일자 영국군 치안 보고서는 하이파 전투에 대해 다르게 기술하고 있으며 CIA 자료 분석과 BBC 라디오 방송도청에 기초한 다른 두가지 연구에서는 아랍 평의회가 이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작전수행을 지도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4월 21일 부터 하가나는 하이파 항에 박격포 공격을 실시해 아랍측의 사기를 꺽고 이로써 저항세력이 붕괴되고 조속히 저항하도록 유도했다 … 포격과 공세가 아랍 난민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 3인치 박격포를 군중이 모여있는 시장 광장 지역에 발포해서 … 패닉상태에 빠트렸으며 항구쪽에 대한 포격과 경찰들의 압력으로 난민들이 보트를 이용해서 도시를 빠져나가게 되었다 ? 베니 모리스

4월 21일 하가나는 하이파의 아랍계 주민에게 “반란분자들의 침입을 색출해내지 않는이상 공격이 개시될 것이므로 여자와 아이들을 대피시키”라는 방송을 했으며 확성기 부착 자동차를 활용해서 하가나는 “심판의 날이 다가왔으며” 거주민에게 “외국 범죄자들”을 쫓아내고 “외국 범죄자들에게 점령된 집과 가정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여자와 아이, 노인들을 내보내서 이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라는 심리전을 통해 하가나는 전투에서 상대방의 명령계통을 빠르게 마비시키고 사기를 꺽었다. 박격포 탄막사격과 심리전 방송, 보병의 심리전술, 집과 집을 전진하는 시가전이 맞물리면서 아랍측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이는 물리적인 파괴보다 더 큰 문제가 되었다. 5월 중순에 하이파에 아랍계는 니스와스 와디의 4천명 정도만이 남았지만 이 곳은 플랜 다렛에서 하이파의 도시개발부서의 조언을 참고해 조직적으로 아랍인 가옥을 파괴하기로 계획된 곳이었다.

1948년 5월 15일부터는 아랍계 축출은 일상적인 과업처럼 되었고 이스라엘 군이 거주민들을 쫓아낸 땅을 이스라엘 측이 분배하게 되자 아랍계 축출과 관련된 정책적 반대는 사라져 버렸다. 그후로 주변 마을 거주민들의 피난행렬이 라말라로 가는 도로를 메웠으며 더 이상 “이성적인 설득”은 없어졌고 이스라엘 군이 진격하는 곳에서 아랍인은 불도저에 휩쓸리듯이 밀려났다. 하이파가 함락되자 이곳으로 통하는 도로를 위협할 수 있는 갈멜산 기슭의 마을들이 다음 목표가 되어 1948년 5월 9일부터 카프르 사다, 알 티라, 카쿤, 카란수와, 탄투라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쫓겨났다. 1948년 5월 11일, 벤구리온은 보좌관들을 소집해서 회의를 열고 하가나 연대급 지휘관들에게 아랍 군단의 공세로 자신들의 핵심과제인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청소는 여전히 플렌 달렛의 핵심 목표”임을 상기시켰다. 알렉산드로니 여단의 지휘관은 갈멜 기슭 돌출부를 포위했고 해안지역 공세의 일환으로 해안에 접해있던 탄투라가 포위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하루 전인 5월 22일 밤 탄투라는 하가나의 알렉산드로니 여단 33대대에게 점령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은 탄투라에게 항복 권고를 하지 않았고 수십명의 주민이 살해되고 300여명의 남자와 200여명의 여자와 어린아이가 포로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갈멜산 기슭 마을의 주민 대다수는 아랍이 점령한 지역과 이미 이스라엘이 점령한 푸레이디스로 도주했고 여자 포로들은 푸레이디스로 옮겨졌다. 1948년 6월 30일자 하가나의 정보부 SHAI의 “1948년 전반기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이주” 보고서에 의하면 전체 피난민의 약 55% 이상이 하가나의 작전에 의한 것”이며 이르군과 레히의 작전으로 “15%정도의 민간인이 피난을 떠났고” 그에 덧붙여 2%정도는 이스라엘 군의 명령과 관련해서 일어난 난민이고 1%는 심리전에 의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즉, 73%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에 의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씅며 그에 더해 22%의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주민 사이에 퍼진 공포와 자신감 문제 때문에 발생했으며 아랍계에 의한 경우는 5%에 불과했다.

모리스의 추산으로 이 단계에 이스라엘을 떠난 팔레스타인 아랍계는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며 영국측의 문서로는 이스라엘 독립 당시의 팔레스타인 난민 수를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3단계 1948년 7월부터 10월까지

다니 작전과 데켈 작전으로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깨면서 축출의 3단계가 시작되었다. 리다와 라믈라에서는 벤구리온과 이츠하크 라빈의 명령에 의해 6월 14일에 전체 아랍계 축출 인구의 10%에 달하는 6만명의 아랍계를 축출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 개시 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난민이 발생했다.

플라판에 의하면 벤구리온은 라믈라와 리다가 이집트군과 협력해서 라믈라 근처의 네그바 키브츠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되었고 리다의 경찰서를 점령한 아랍 군단의 존재등이 문제되어 두 도시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니 작전에서 두 마을이 점령된 다음 그와 같은 협력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한다.

플라판은 “리다에서 난민들은 도보로 도망쳤고 라믈라에서는 IDF가 버스와 트럭을 제공했다. 원래 모든 남자들 모두 모여있고 포위되었으나 몇몇 총성이 들린 다음 벤구리온은 아랍군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보아 구류해두고 있던 상황에서 여자와 아이 노인을 포함한 남은 아랍계를 모두 신속히 축출하도록 지시했다. 그와 함께 플라판은 벤구리온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들이 패배 후에 일어난 일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츠하크 라빈은 자신의 비망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벤 구리온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거나 사령부에서 작전을 논의하지 않고 평소에 그러하듯 침묵을 지켰더라면 두 도시에 있는 5만명의 민간인에게는 어떤일이 일어났을 까. 우리가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리다에 적대적이고 무장한 집단을 남겨두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알론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했을까. 벤구리온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들을 모두 쫓아내. … 쫓아내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심리적으로 이일은 우리가 맡아야 했던 일 주에서고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리다의 민간인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무력을 사용하고 경고사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민간인들을 10~15마일이나 떨어진 곳의 아랍군과 합류하도록 이동하게 할 방법이 없었다. (Soldier of Peace, p. 140?141)

플라판은 나자렛에서도 결과는 달랐지만 비슷한 형태의 축출이 일어났다고 지적한다. 리다와 라믈라에서 소개되기 3일전인 6월 16일에 이스라엘 군은 나자렛을 포위했다. 지휘관은 캐나다계 유대인 벤 던켈만으로 그는 훗날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이 된 체임 라스코브 준장의 허락을 얻고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협의에서는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으나 다음날 라스코프는 던켈멘에게 민간인을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개작전중에 부가적으로 약탈이 널리 행해졌고 몇건의 강간이 보고되었다. 모리스에 의하면 결과적으로는 약 10만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가 이 단계에서 난민이 되었다.

4단계 1948년 10월 부터 1949년 3월까지

이 시기의 난민발생은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성과로 특징지어진다. 10월의 요압작전으로 네게브로 향하는 도로를 확보했으며 브엘셰바가 함락되었고 10월 말의 히람 작전으로 상부 갈릴리 지역을 점령했으며 12월의 호렙작전과 1949년 3월의 우브다 작전으로 네게브 전역이 점령되었다. 이 작전은 난민이 되어 이곳으로 이동한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스라엘 군은 갈릴리와 인구가 적은 네게브 사막을 점령했다. 갈리리의 마을은 아랍계가 떠난다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될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전보다는 적은 수의 마을만이 소개되었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한 것은 명백하게 축출에 의한 것으로 모리스는 이에 대해서 “지휘관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아랍계를 축출하도록 명확히 명령했다.”

상부 갈릴리에서의 히람 작전중에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 “점령한 지역에서 모든 적대요소를 신속히 제거하라. 저항세력이 점령지역을 떠날 수 있도록 도우라(1948. 10.31. 모세 카멜)

UN의 중재고나 랄프 분크는 국제연합 감시관들에게 이스라엘 군이 갈릴리의 마을들을 약탈해서 양과 염소 및 나귀를 데려갔다고 기록했다. 이 보고에는 군용 트럭과 교통수단을 사용한 조직적인 약탈로 보인다고 되어 있으며 상황에 대해서 이스라엘 군에 의해 일단의 난민들이 새롭게 레바논으로 쫓겨났고 카크지의 군이 갈릴리를 점령하고 레반 전선을 가로 막았다고 되어 있다. 분크는 계속 해서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 남동부를 점령하고 레바논의 15개 마을이 이스라엘의 영향력 하에 점령되었다고 적고 있다.

모리스에 의하면 20만에서 23만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가 이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떠났고 일란 파페에 의하면 “7개월 동안 531개 마을이 파괴되었고 11개 도시 근교 지역이 소개되었다. … 학살과 강간, 1년간 강제노동 수용소 투옥이 수반되는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다.”

현재의 중재와 로잔느 회담

UN 중재

국제연합은 감독기구와 혼성 휴전협정 감시단을 파견했다. 1948년 난민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논의되면서 폴케 베르나도트 백작은 9월 16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랍 난민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어떤 이주도 정당하게 종료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유대인 난민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올 수 있는 권리는 인정되는데 이 무고한 희생자들의 권리가 침해된다면 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아랍 난민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1948년 12월 11일에는 UN 총회 결의안 194호가 통과되었고 계속 재확인되고 있는 바로는 이스라엘은 난민들이 돌아올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는 난민들의 권리는 가능한한 빨리 인정되어야 하며 이들이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상실한 재산에 대해서는국제법상의 원칙에 따라 정부나 그에 준하는 관련기관에서 보상을 실시해야 한다.

1949년 로잔느 회의

1949년 로잔느 회의에서 이스라엘은 10만명의 난민이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여기에는 이미 돌아와있는 25,000명과 약 10,000명의 이산가족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또한 아랍측과 완전한 평화조약이 체결될 경우에 이스라엘이 영토를 차지하는 대신 아랍국가들이 난민을 흡수하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돌이켜보면 로잔느 회의는 비록 중동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적절하고 아마도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욕감을 느낀 아랍측의 거부주의와 승리에 들떠있고 현실적인 유대인 난민 증가로 인한 물리적 필요를 감안한 이스라엘 간의 입장차이로 회담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양측이 합의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만족할만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10만명 제안은 고전적으로 너무 작고 늦은 해법이 되었다로 한 아마도 유일하고,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상실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원인에 대한 논의

논쟁 초기

난민 문제가 발생한 후 10여년간에는 두가지 상반되는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에스킨 칠더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아랍이 1948년 전쟁을 위해 전장을 정리하고 싶었던 아랍측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았기에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아랍난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아랍에서는 그 원인을 총검에 겨누어진 채 시오니스트들이 유포한 소문에 동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고 요약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안적인 설명으로 페레츠나 가베이의 경우에는 심리적인 면에서 접근해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패닉과 히스테리로 난민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신 역사’ 이후의 변화

1980년대에 이스라엘이 문서고를 민간에 개방햇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학계에는 “신 역사학자”라는 급격한 학파가 등장했으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보다 비판적인 분석을 선호했다. 이 그룹의 가장 유명한 학자인 베니 모리스는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공격이 아랍 난민이 발생한 직접적인 주원인으로 주변의 아랍계 마을이 점령당한 두려움이 이를 확대시켰다고 보았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주장하던 전통적인 시각은 난민 발생은 이스라엘이나 아랍의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8년 전쟁의 부산물이라는 주장으로 대체되었다. 아랍의 주장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신 역사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파페는 아랍 난민 발생을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이라고 규정하면서 시오니스트들이 장기간에 걸쳐서 아랍계를 추방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결과

팔레스타인 거주지의 파괴

조사자 마을 촌락 부족 총계
모리스 10 342 17 369
칼리디 1 400 17 418
아부 시타 13 419 99 531

모리스의 연구는 다른 연구자들과 달리 마을 이외의 거주지들을 제외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적게 잡고 있다. 칼리디의 연구는 296개의 파괴되거나 인구감소가 일어난 촌락을 추가로 포함하고 있으며 칼리디가 언급한 418개소의 주거지 중에서 70%에 달하는 292개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부시타의 연구에서는 브엘셰바 주변의 부족들을 추가했다. 이 분야에 연관된 영국이나 다른 문서들을 참고해보면 1948년에 472개소의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이 파괴된 것으로 집계된다.

시기별 구분 파괴된 지역의 수 난민의 수 유대인 인구밀도
1947.11.29. ~ 1948.03 30 22,600 1.159
1948.04. ~ 1948.05.13 199 400,000 3.363
1948.05.15. ~ 1948.06.11. 290 500,000 3.943
1948.06.12. ~ 1948.07.18. 378 628,000 5.224
1948.07.19. ~ 1948.10.24. 418 664,000 7.719
1948.10.24. ~ 1948.11.05. 465 730,000 10.099
1948.11.05. ~ 1949.01.18. 481 754,000 12.366
1949.01.19. ~ 1949.07.20 531 804,000 20.350

팔레스타인 난민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합의된 적은 없지만 UNRWA는 ‘1946년 6월부터 1948년 5월까지 팔레스타인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으로 1차 중동전쟁으로 집과 생활공간을 잃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UNRWA의 난민에 대한 정의는 이렇게 발생한 난민의 후손들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UNHCR의 표준적인 난민 정의와는 다르다. UN이 추산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최종수치는 711,000명이지만 1950년 UNRWA에 등록된 난민의 수는 914,000명이다. UN조정위원회는 이 수치가 “배급카드의 중복 발급이나 이스라엘 점령 지역 외부의 난민들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증가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UNWRA는 불명확한 사망자 수와 높은 1년에 3만명 꼴로 증가하는 출생율을 고려해야 한다고 첨언하고 있다. 1951년 6월에 UNWRA는 등록 수치를 잘못되거나 중복된 등록을 제거한 뒤에 876,000명까지 줄였으며 1/3은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에 있고 1/3에 약간 못미치는 인구가 요르단에 17%는 시리아와 레바논에 그리고 15%가 아랍과 서방 국가들에 거주한다고 확인했다. 약 1백만명의 난민이 UNRWA의 인증카드 외에 신분을 증명할 인증서류를 갖고 있지 않다.

불법입국 방지법

1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위기를 벗어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이러한 시도가 계속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침내 팔레스타인의 아랍계를 “불법입국자”로 간주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커스바움은 이스라엘 정부가 1945년의 긴급조치들을 수정하거나 취소하는 대신에 국가 긴급상황을 계속해서 연장하고 있다면서 1954년의 불법입국 방지법은 공식적으로 긴급조치는 아니었지만 1945년의 긴급 규제 112호의 연장선에서 불법입국자들을 퇴거시키는 비정규적 방법을 허용한 것으로 법리상 이스라엘 의회가 국가 비상사태를 취소한 것에 의해 법적 효력이 정지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산과 토지관련 법률

이스라엘은 건국초기에 부동산을 비롯한 각종 재산 국유화를 규율하는 법체계를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초창기에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 법의 효력을 유지하다가 나중에 신법으로 대체해 나갔는데 이스라엘 법률체계가 마주한 첫번째 도전은 토지 소유권을 적법한 소유자에게 반환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 토지 관렬 법률이 최초로 통과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초기 법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25조 긴급 규제법으로 이는 토지의 소유권을 제한해, 실질적으로는 토지가 점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효취득한 것으로 판단한다. 부재자 재산관련 법은 이스라엘 건국후에 발령된 긴급 법안 중에서 가장 먼저 통과된 법안으로 부재자 재산에 관한 법률 37조는 나중에 긴급 규제법과 기타 관련 법안으로 대체되었다. 이 법들은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를 규정하는 다른 이스라엘 부동산관련법과는 달리 토지의 소유자에 관한 문제를 규정하고 있고, 특별히 토지를 놔둔채로 난민이 된 아랍계 주민의 토지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이러한 부재자 재산은 이스라엘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1954년도 기준으로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1/3 이상이 부재자 토지에 거주하고 있었고 새로 이주해온 25만명의 유대인 중에 1/3이 아랍인들이 방치한 토지에 정착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370개소 이상의 유대인 정착지가 부재자 토지에 건설되었다.

이 부재자 재산관련 법안은 아랍 각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 난민 문제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같은 연관선상에서 보고 있다.

Nakba

"Nakba"는 아랍어로 재난 이나 재앙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인 1938년에 출간된 조지 안토니우스의 저서 ‘아랍의 여명'”에서 언급된 말이다. “1920년은 아랍인에게 재앙의 해(am al-Nakba)로 1차대전 이후 첫 무장폭동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를 비롯한 아랍 각국에서 일어났다.”는 이 책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나크바라는 단어는 영국과 프랑스 위임통치령에 거주하는 아랍계의 분열과 벨푸어 선언으로 인한 유대인 국가의 독립이 현실화된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나크바는 베이루트 미국대학의 역사학자 콘스탄틴 주레이크가 1948년의 동명 저서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1967년 6일전쟁이 끝난 이후에 주레이크는 새저서에서 나크바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고 무하마드 니미르 알 하와리도 나크바를 1955년 자신의 저서에서 1차 중동전쟁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1948년의 1차 중동전쟁은 팔레스타인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에 관련된 수많은 시와 노래가 만들어졌다.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이 사건은 매우 강한 감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달력에서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5월 15일은 나크바 데이로 중요한 추모일이다.

http://en.wikipedia.org/wiki/Palestinian_Exo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