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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레바논 내전 2. 국가속의 국가 PLO

1960년대 아랍권은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사건(1956)으로 나세르 주의가 열풍처럼 휩쓸고 있었고 이것이 인구 변화와 함께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런 와중에 1958년 기독교 출신의 샤문(Camille Chamoun)?대통령이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하는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인자 이슬람 세력이 반발했다. 게다가 샤문 대통령이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한 채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임하려?하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규모?반란을 일으켰으며 1개월 후 반란은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샤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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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악화되자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터키 주둔 병력 15,000 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미군이 개입하고 대통령 선출을 국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일단 사태는 수습되었다. 미국은 아랍연맹이 UN에 '중동평화결의안'을 제출하고 미군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내전이 진정된 1958년 10월 중순부터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3개월간의 내전으로 2,7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미군도 24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아직은 기나긴 레바논 내전의 씨앗이 뿌려진 것에 불과했다. 이미 레바논은 기독교 계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아니라 1/3에 불과했고 아랍계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빈민과 부자, 범아랍주의와 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이 겨루는 혼란에 빠지고 있는데 집권세력인 마론파 기독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나눠줄 의향이 없었다. 이로 인해 갈등이 쌓이는 상황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70년대의 아랍은 60년대의 희망이 무너진 시대였다. 나세르 주의의 이상은 아랍 지도자들 간의 알력으로 무너졌고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카운터로 결정타를 맞으면서 끝났다. 정부의 무능함과 부패가 드러났고 지도층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아랍은 새로운 얼굴, 새로운 희망을 구했고 새로 주목을 받은 것은 PLO였다. 1964년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아메드 슈커리를 내세운 PLO 를 창설했고 초기의 PLO는 아랍 형제국가들의 지원이 없다면 효과적인 투쟁이 불가능한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알파타는 독립적인 조직이었고 6일전쟁 이후 게릴라 조직들 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후 1969년, 아라파트는 PLO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팔레스타인 최초의 진정한 민족운동 기구로 변모시켰다.


야세르 아라파트

70년대의 세계는 저항운동의 절정기였고 무명의 게릴라였던 아라파트는 저항과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그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 9월 팔레스타인의 급진 게릴라들이 여객기 3대를 납치해 요르단에 착륙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요르단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사태를 우려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PLO 지배하의 난민촌과 수도 암만 지역에서 정예부대인 아랍군단을 투입하여 토벌 작전을 펼쳤다. PLO는 요르단에서 축출되었고 아라파트도 여자로 변장해서 암만을 빠져나와야 했지만 이런 패배는 PLO의 성장에 오히려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PLO는 인접한 레바논으로 이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항공기 납치, 해외 이스라엘 공관에 대한 테러 등, 대외활동을 수행하기 쉬운 국제도시 베이루트를 무대로 캠프를 설치했다.


검은9월단 사건

1972년 뮌헬 올림픽에서 검은9월단(70년 9월 요르단에서 축출된 것을 기억하는 이름)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하여 11명을 살해한 사건이 상징하듯 수많은 테러행위는 PLO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를 세계에 보여주었다. 73년 10월 전쟁 이후 중동전쟁에는 오일머니가 쏟아졌고 그에 탄력을 받은 PLO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레바논을 잠식하면서 UN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게되자 레바논의 국위는 PLO 앞에 무릎을 꿇었다. PLO는 훈련된 전투조직과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된 병사가 있었고 시리아를 통해 풍부하게 무기를 공급받는데 비해 마론파 기독교는 오합지졸의 민병에 불과했다. 궁지에 물론 마론파는 이스라엘에서 무기를 공급받았고 외세가 레바논의 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었다. 레바논은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레바논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