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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2차 중동전쟁, 2. 전쟁과 외교

침공




시나이 전역 작전도.



카데시 작전 :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작전

카데시 작전은 시나이 북부에 위치한 신명기(Deuteronomy)에 언급되는 고대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목표는 샬름 엘 세이크(Sharm el-Sheikh), 알 아리쉬(al-Arish), 아부 우와율라(Abu Uwayulah), 가자 지구(Gaza Strip)라는 4대 목표를 점령하는 데 있었다. [각주:1] 이집트의 티란해협 봉쇄망 중심에 있는 샬람 엘 세이크를 점령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1953년 후 처음으로 홍해를 접하여 인도양으로 통하는 연결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자 지구가 선정된 이유는 아랍 게릴라들의 훈련시설이 위치한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역으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술을 이집트에게 펼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또,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의 병력, 장비, 주요 통제소가 위치하고 있는 알 아리쉬와 아부 우와율라는 이스라엘 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발생할 수 있는 측면 공격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격 목표로 선정되었다. 이들 목표지점을 모두 점령한다면, 시나이 반도 전역에서 이집트의 전략계획에는 치명타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집트 군이 본국으로 후퇴하면 나머지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떠맡아서 이집트의 반격을 적절히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남 시나이 반도의 초동작전

이스라엘군 총참모장 모세 다얀 소장은 초기 단계에서 미틀라(Mitla Pass)를 점령,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후일 이스라엘군 총사령관이 될, 라파엘 에이단 중령(Lieutenant Colonel Rafael Eitan)이 지휘하는 202 공수여단 1대대를 요충지인 제벨 하이탄(Jebel Haitan) 근처 파커 기념비(Parker's Memorial)에 투입할 계획을 세운다. 202 공수여단의 잔류 인원은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대령의 지휘하에 전진해서 항공투입된 1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1956년 10월 29일, 3시 30분, 16대의 다코다 수송기가 텔아비브 공항을이륙함으로써 시나이 점령을 위한 카데쉬 작전이 개시되었다. 실행단계에서 작전은 예정되로 진행되지 않아 당초 목표되었던 지점에서 몇 km정도 떨어진 지역에 투입되어 시간과 노력이 들긴 했지만 결국 지정 위치까지 이동하는 데 성공한 선발대는 항공기에서 투하된 중장비도 수령하여 참호를 구축하고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아카바 만의 초기 작전과 중부전선

한편, 제9보병 여단은 샬름 엘 세이크를 공격하기 위한 주요한 거점이 될 라스 알 나크브(Ras al-Naqb)를 포위한 다음 정면 공격 대신 일부를 배후로 우회하던 중 통로를 찾아내어 이집트 군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하는데 성공, 큰 피해가 따르리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이집트 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요시프 하르파 대령(Colonel Josef Harpaz) 지휘하의 제4보병 여단은 아부 우와율라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이 될 알 쿼세이마(al-Qusaymah)를 점령했다.


자벨 하탄 전투와 202 공수여단의 공격

아리엘 샤론이 지휘하는 202 공수여단은 1대대와 합류, 모래바람을 틈타 점령지를 손쉽게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30일에는 나클라(Nakla) 근교의 이탄(Eytan) 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전선이 너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모세 다얀은 더 이상 미틀라를 통해 진군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샤론은 자벨 하탄의 이집트군 주둔지를 바로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중화기와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 군 주둔지를 경무장 공수부대 만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극심한 손해를 입으면서도 이집트 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나중에 샤론의 책임 문제로 논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때, 이스라엘이 입은 인명 손실의 대부분은 자벨 하탄 공격에서 입은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의 작전 계획도.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군

침공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규모 공군이 키프로스와 말타에 배치되었으며 수많은 항공모함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키프로스의 두 공군비행장과 증설된 세번재 비행장은 수많은 프랑스 군용기들로 가득차 있었고 말타 섬은 영구공군의 루카 폭격비행대가 근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영국은 항공모함 HMS Eagle, Albion, Bulwark를 이 지역에 파견하였고 프랑스도 항모 Arromanches, Lafayette를 파견하였다. 이에 더하여 영국 해군은 HMS Ocean, Theseus를 영국 헬리콥터 공수부대의 공수작전을 위한 경유지점으로 준비해두었다.(세계최초의 헬리콥터 공수작전).

한편, 이스라엘 국경 경비대는 이스라엘-요르단 접경지대에서 준군사집단화 하여 요르단 강 서안을 포함한 중립지대에서 군정활동을 벌였고 이 와중에 10월 29일,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48명의 아랍 민간인이 사망하는 카프르 카심 학살 사건(Kafr Qasim massacre)이 일어났다.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었고 31일, 삼총사 작전(Operation Musketeer)을 발동하여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다. 11월 3일, 제 14, 15 비행대 소속의 F4U-7 콜세어 20기가 프랑스 항모 아로망쉬와 라파예트에서 이륙, 카이로 공항을 폭격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에 있던 선박 40여척을 모두 침몰시키고 57년 초까지 더이상의 선박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

11월 5일에는 영국의 제3공수대대가 엘가밀 비행장(El Gamil Airfield)에 공수되어 이 지역을 점령하고 항공지원 기지를 확보하여 항공지원 및 수송로를 확보했다. 이에 발맞추어 11월 6일 미명에는 영국의 42, 40 코만도 왕립 해병대가 2차대전 시절의 상륙정을 사용, 해변에 상륙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전대는 지원을 위해 해변에 일제포화를 퍼부어 해안의 이집트 포대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 와중에 포트 사이드 시가지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 영국군과 연계하여 프랑스도 알제리에서 제2식민 공수 여단(2eme RPC) 소속의 중무장 공수부대원 500여명을 노라틀라스 노르드 2501 항공기로 알 라스와 다리(al-Raswa Bridge)쪽에 투입하였으며 연속으로 공병단과 방어병력을 투입해왔다. 2명의 병사가 사망하기는 하였으나 서쪽 가교들은 프랑스 공수부대에게 순조롭게 제압되었고 14, 15 비행대 소속의 F4U 콜세어는 일련의 항공 폭격을 수행하여 수대의 SU-100 대전차 포를 파괴했다. 동시에 F-84F 부대는 포트 사이드의 대규모 유류저장탱크를 파괴하기도 하여 시가지 대부분의 수일 동안 불길과 매연에 덮이는 피해를 입혔다. 이집트군의 잔존부대가 미약한 저항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주요 부대는 거의 저항없이 붕괴되어 버렸다.



포트사이드의 프랑스 제 2공수부대 1956년 10월.


정오에는 프랑스의 제1공수부대(Regiment Etranger Parachutiste, 1st Foreign Parachute Regiment) 소속의 공수부대원 522명이 포트 포드(Port Fouad) 근교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공군의 콜세어들의 항공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항모 라파예트에서 사출기 고장이 발생하여 예정에 훨씬 못미치는 40기 정도만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에서 프랑스는 10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영국의 제 45코만도 특공대는 헬기로 공수기습작전을 수행하여 해안포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항모에서 출동한 영국항공기들의 오인폭격으로 인하여 45명의 특공대원과 사령부가 파괴되는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시가전에 돌입하면서 잘 은폐되어 있던 이집트 저격병들에 의하여 더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라파 전투

가자지구의 전략적 요충지 라파에서 2차 중동전을 통털어 양측모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발생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은 시나이 반도의 핵심인 가자지구를 점령하기 위한 최고의 요충지였으며 협상테이블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 총사령부는 제 1보병여단과 제 27기갑 여단을 급파하지만 이 전투가 마치 무인지대를 질주하는 것 같았던 다른 전투와는 전혀 다를 것이었다.

이집트군은 이곳에 6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 셔먼전차 1개 중대를 비롯하여 아처 대전차 자주포 15문을 배치해두고 강력한 진지와 지뢰밭, 철조망 지대로 보강된 방어진을 구축한 상황이었기에 단기간의 작전은 무리였지만 상황은 너무 긴박했다. 공군 또한 너무 근접한 양측의 위치로 인하여 지원을 할 수 없었다.

11 1, 새벽3시 이스라엘군은 일제 공격을 개시하여 지뢰지대를 개척하고 참호에 육박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피아간 구분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제 1보병여단 1대대 A중대장 요나단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점령목표인 25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하였고 인접한 진지를 할당받은 나할 중대원들과 합류한 이스라엘 군은 운좋게도 26진지와 이어진 좁다란 교통호를 발견하여 대혼란에 빠진 적을 교통호를 통해 기습하는데 성공한다. 날이 밝으면 전차부대가 돌입할 것이었으며 완전히 적진지를 장악하지 못한 이상 전차대의 위기가 문제시 되어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지휘관들은 전차를 안전지대로 철수 시키고 참호를 파서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총사령부는 의견을 기각했다.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공병들이 간신히 개척한 통로를 통해 진지에 육박전을 펼쳤고 결국 이날 라파 방어선을 이스라엘군이 점령했다.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에서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전선이 붕괴된 이집트 군은 아카바만의 요새, 셀름 알 세아크에서 항복하여 시나이 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포기하게 된다.



정전과 철수

군사적으로, 수에즈 운하 작전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수에즈를 둘러싸고 미국은 소련과 헝가리 사태에서 혁명의 유혈진압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던 미국은 유럽의 주요 동맹국의 행동으로 인하여 소련을 비난할 외교적 카드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이집트 편을 들어 전쟁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런던과 파리, 텔아비브를 향하여 "어떤 종류의 파괴적인 무력 행사"도 배제할 수 없다는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 당시 동구권은 헝가리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예상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이제나워 행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휴전을 권고하였으나 연합군은 이에 대해서 응하지 않았다. 미국은 침공 정지를 요구하면서, UN 안전보장 이사회에 정전결의를 요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미국은 UN 총회에 안건을 상정하면서 재차 병력 철수를 요청했고 총회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청하는 한편, UN긴급대응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의 구성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 1001호 (resolutions 1001)을 승인했다. [각주:2] 게다가 포르투갈과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군하지 않는다면, NATO에서 제명하자는 제안을 내놓기 까지 하여 [각주:3], 국제 외교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영국과 프랑스는 1주일 만에 이 지역에서 철군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NATO는 영국에게 재정적인 압박을 가하였으며 아이젠하워는 미 정부가 영국의 파운드화 보유분을 매각해서 영국 경제를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또, 사우디 아라비아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선언하자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원조 요청을 거부했고, NATO의 다른 회원 국가들도 아랍으로 부터 수입한 석유를 영국과 프랑스에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각주:4] 동시에, 영국연방(British Commonwealth) 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 캐나다 수상 루이스 로렌트와 오스트레일리아 수상 멘지스의 비난 성명도 당시까지 영 연방 회원국을 대영제국의 일원이며 국제사회의 역학관계에서 영국의 자동적인 지지자로 간주하고 있던 영국정부에게 타격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영국 정부와 파운드화는 심각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이든 수상은 사임하였으며 영국은 1956년 11월 6일 이 지역에서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 경고하면서 철수했다. 포트 사이드의 부대는 런던의 사령부에서 추가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국 1956년 12월 22일, 영국-프랑스 작전부대는 UNEF(UN 긴급대응군)의 덴마크, 콜롬비아 군에게 임무를 인수 인계하고 철수했다. [각주:5]한다. 이스라엘 군은 57년 3월에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1962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지역의 UNEF소속 캐나다 군.

철수가 이루어지기 전, 캐나다 내각의 외무장관이며 훗날 캐나다 수상이 될, 레스터 피어슨(Lester Pearson)은 국제연합 비상군(UNEF)이 수에즈에 배치되어 "정치적인 협상이 완성되기 전에 경계선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국제연합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외교적인 협상의 기간 중에 NATO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같은 주요 동맹기구들과 관련이 없는 중립국가 군이 "인간띠"를 구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UN 평화유지군이 창설되었으며 피어슨은 이 공로로 5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으고, 현대적인 "평화유지"개념의 대부가 되었다.



래스터 B 피어슨




결과



이스라엘 군 공식 잡지, B'Mehaneh 11월 4일자. 이스라엘 군, 육해공에서 승리를 거두다.


참전세력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이집트
참전병력 이스라엘 : 175,000
영국 : 45,000
프랑스 : 34,000
이집트 : 300,000
사상자 이스라엘 사망 197명
영국 사망 56명 부상 91명
프랑스 사망 10명 부상 43명
이집트 사망 650명
부상 2,900명
포로 2,000명




영국에게 이 전쟁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에 최후로 해외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 군사력을 이용한 사건이었고, 그 결과는 이든 수상의 불명예스러운 퇴임이었다. 그러나 나이젤 애쉬튼(Niegel Ashton)은 "수에즈 사건으로 이 지역에서 영국의 국제전략이 변화된 것은 별로 없다"고 평했으며 해롤드 맥밀란(Harold Macmillan)은 이든의 모든 결정은 나세르의 폭주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평하고 있는 등, 외교적인 패배가 가져온 영향에 대해서는 분분한 논란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위상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 이 사건은 NATO 동맹의 약함과 무계획성, 공조 부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드골의 관점에서 수에즈 사건은 프랑스가 외교 정책 추구에 있어서 더이상 연합군, 특히 미국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후, 1957년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핵실험을 강행하고, [각주:6] 소련만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대응군(Force de frappe)을 창설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하고 1966년에는 NATO의 군사 지휘체계에서 탈퇴했다.
또, 세브르 협약에 따라, 프랑스는 비밀리에 기폭기술을 비롯한 자국의 핵기술을 이스라엘에 넘겨준다. [각주:7]

국제무대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나세르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랍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범아랍민족주의를 전진시키고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강경론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이 위기는 식민시대에 조종을 울렸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대부분이 이후 몇년 내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수에즈 사건 이후, 아덴과 이라크가 중동에서 영국의 핵심적인 기지가 되었으며 프랑스는 베이루트와 튀니지의 비제르타를 근거지로 하게 된다.

국제연합평화유지군은 시나이에서 주둔하면서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지역에서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예산 문제로 1967년에는 병력이 3,378명까지 축소되었으나 이 때부터 이집트는 다시금 시나이 반도에 무장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유엔군에게 철군을 요청하고 티란 해협을 봉쇄하며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는 결국 6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년후, 아이제나워는 미국이 수에즈 위기에서 미국의 냉전시기 유럽에서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정을 하는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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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wikipedia.org/wiki/Suez_Crisis

  1. 이집트는 프랑스와 영국이 침공할 경우에도 대비해야했기 때문에 시나이 반도의 주요지점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2. UNGA Emergency Special Sessions  [본문으로]
  3. Z Magazine, April 2, 2003,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ItemID=3376 last visited 2/28/07 [본문으로]
  4. Kennett Love, Suez: The Twice-Fought War, New York: McGraw Hill, 1969, p.651 [본문으로]
  5. Service Cinematographique des Armees SCA reportage de Paul Corcuff, December 22nd 1956 French Ministry of Defense arcvhives ECPAD MO56141AR14 [본문으로]
  6. [http://www.defense.gouv.fr/content/download/60823/571529/file/SAHARA.pdf Delegation a l’Information et a la Communication de la Defense: Dossier de presentation des essais nucleaires et leur suivi au Sahara], French Defense Ministry, January 2007 [본문으로]
  7. Affaire de Suez, Le Pacte Secret, Peter Hercombe et Arnaud Hamelin, France 5/Sunset Presse/Transparence, 200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