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드레이크 썸네일형 리스트형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