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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World War

1차 세계대전의 원인

World War I, WWI , the First World War, the Great War, "모든 전쟁을 종식시킨 전쟁"

1914 ~ 1918 주로 유럽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범지구적 규모의 전쟁을 일컫는 말. 수백만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현대 세계의 기초를 만들었다.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중심이 되고 나중에 이탈리아와 미국이 가담한 연합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오스만 제국의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 중 대부분의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양측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참호와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동부전선에서는 광활한 평야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며 철도수송능력의 제약으로 비교적 참호전 양상이 덜했으나 전투의 규모는 서부전선만큼이나 대규모였다. 잠수함이 투입되었고 사상 최초로 공중전이 일어난 전쟁이기도 하다. 여러 전장에서 900만명 이상의 병사들과 수백만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오스만, 러시아 제국들이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자국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새로운 국가들이 건국되었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했다.  1차대전은 나폴레옹 전쟁과 시민혁명으로 구축된 구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역학관계를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은 21년 후에 벌어질 2차 세계대전에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일반론

1차대전의 원인들로 흔히 지목되는 것은 앞글자를 따서 MAIN이라고 불린다.(Militarism, Alliances, Imperialism, Nationalism = 군국주의, 동맹관계, 제국주의, 민족주의.) 어느 하나의 원인이 중심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원인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하여 대규모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봐야한다.

1. 시간진행

-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권자이며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과 홀렌부르그 공작부인이자 그의 아내인 소피와 함께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시페였으며 그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소망하는 청년 보스니아 의 일원으로 이 집단은 구성원이 15명이었으며 "Black Hand"에게서 후원을 받고 있었다.

- 동맹관계인 독일의 지원을 얻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에게 암살범의 처벌을 요구했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게 대단히 강경한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독립보장 약속에 의지해서 오스트리아에게 일부 수용안을 제시했으며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전쟁을 선언했다.

- 러시아는 세르비아와의 동맹관계에 따라 동원령을 선포했으며 동원된 병력 일부를 오스트리아 국경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7월 31일, 러시아군 최고 사령부는 이런 대규모 동원령을 수행하는 것이 보급차원에서 불가능하다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동원령이 발호되었다. 동시에 독일은 러시아에게 8월 1일 선전포고하고 2일 뒤에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 이 연쇄적인 선전포고에는 몇가지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있는데, 당시 독일은 러시아-프랑스의 동맹관계 때문에 어느 한쪽과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형국에 처하는 입장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리펜 계획을 기본전략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술리펜 계획은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가 열악한 도로, 통신환경으로 느리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먼저 전력을 집중하여 벨기에를 경우하는 우회코스로 프랑스 중심부로 침투, 격파한 다음, 독일의 발달된 철도 운송체계를 이용하여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회군, 러시아를 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전쟁이 결정되자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 한 다음, 접경지대의 저지대 국가 룩셈부르크를 합병하고 벨기에 영내로 진격했으며 영국은 1939년 이래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해왔던 데다가, 전통적으로 영국이 도버해협에서 안전한 해상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지역으로 간주했던 관계로 독일에게 8월 4일 선전포고 했다. 이리하여, 유럽의 초강대국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초로 범유럽 규모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사건은 하나의 암살사건에서 촉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격파하고 수립된 비인체제 하에서의 유럽 강대국간의 갈등관계와 민족, 정치관계, 문화, 경제, 집단안전보장체제가 연쇄반응,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 1차대전 확대의 요인

1차대전이 이렇게 확대된 이유로는 몇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 열렬하고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 범 게르만 주의, 범 슬라브 주의
- 지난 분쟁에서 해결되지 못한 앙금 ;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 복합적인 동맹관계 ; 세르비아-러시아-프랑스, 벨기에-영국, 프랑스-벨기에, 오스트리아-독일
- 정치가들의 복합적이고 감정적인 대응
- 외교관계에서의 지연들과 오해
- 수십년간의 군비경쟁 ; 영국과 독일의 건함경쟁
- 융통성 없는 군사전략 ;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
- 식민지 경쟁(제국주의)
- 경제적 경쟁관계

1차대전의 원인에 관해서는 수많은 역사가들과 비평가들이 제시해온바 있으며 각각의 다양한 요인들을 중심적으로 1차대전을 설명해왔다. 어떤 요인이 최종적인 결과로 이르게 되는 과정을 불가피하고 예정된 것으로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동시에 필연적인 요소들 외에도 몇몇 예측하기 힘든 불운한 사건들이 겹치게 된 것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이념적 문제

분쟁원인들 중 몇가지의 기저에는 정치가들과 국민들이 전쟁을 선택하게 한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있었다.

1. 사회적 다윈주의

19세기 말,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생겨났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찰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에서 '생존경쟁'에 관한 부분을 사회에 적용하여 역사를 인종, 국가 간의 생존경쟁의 무대로 파악한다. 이 관점으로, 유럽은 가장 "진화"되고 "진보"된 존재로 자연경쟁을 통해 선택된 것이며 인종과 국가 규모의 투쟁을 가속시키고, 불가피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약해진 문명은 보다 강한 것에 의하여 "도태"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사상적 영향으로 '슬라브'와 '게르만'의 투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으며 강대국간의 식민지 경쟁을 보다 가속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식민지 확장을 위한 경쟁은 국가의 경제와 군사적 능력을 확장하고 라이벌들을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 되었으며 영국의 "전략적 확장" 개념은 잠재적인 경쟁자들에게 번역의 비결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에 사회적 다윈주의의 이념은 확장하지 않고 있는 국가는 라이벌과 이웃국가들에게 뒤쳐지고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효과를 낳았으며 프랑스는 바로 그런면에서 독일에게 도태되고 있는 국가로 비추어졌다.

2. 독일의 내부 정책

독일사민당으로 대표되는 좌익계열의 정당들은 1912년 독일 투표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당시 독일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던 프러시아 출신의 융커들은 좌익 정당들의 확장을 두려워했으며 이런 내부적인 갈등요인을 해결하기 위해서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애국심을 강화하는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유럽 국가들의 세력확장에서 정당한 몫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피해의식을 빌헬름 2세가 보다 확장시켰다고 지적한바 있다.

3. 프랑스의 내부 정책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매우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100년 전의 프랑스 대 혁명시기이래 좌익성향의 프랑스 정부와 왕당파, 보나파르티스트를 비롯한 우익 간에는 지속적인 정치적 투쟁이 벌어졌으며 프랑스가 유럽을 재패하던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관한 기억들은 양쪽모두 당면한 위기를 전쟁을 통한 민족주의 고취라는 해법으로 그에 더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은 단기간에 걸쳐서만 지속될 것이며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 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좌익 성향의 정부는 전쟁을 사회적 개혁의 기회로 보았으며(1914.07, 수입세가 신설되었다.) 우익계열 정치가들은 전쟁을 군대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권력을 장악할 계기로 보았다.

구조적인 문제들

1.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빈 체제 이후, 유럽에서는 변화를 원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간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1800년대 중반, 유럽민족주의는 대단한 기세로 확장되었고 1848년에는 대대적인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초까지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지각변동을 겪었다. 프러시아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1864~1871 기간중 일련의 전쟁을 통해서 독일을 통일시켰고 1866년 카부르와 가리발디가 힘을 합쳐 이탈리아를 통일시키자 유럽에는 새로운 강대국이 둘이나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오스트리아의 변화

"Distribution of Races in Austria?Hungary" from the Historical Atlas by William R. Shepherd, 1911

Distribution of Races in Austria?Hungary" from the Historical Atlas by William R. Shepherd, 1911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정부구조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으로 개편했다. 수백년간 독일어를 사용하는 귀족층을 중심으로 중세적인 지배구조를 유지해온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을 뒤흔드는 민족주의의 물결아래에서 다민족국가의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프란츠 요셉 황제를 비롯한 기존의 독일계 지배 세력은 헝가리의 마자르 족 엘리트들과 타협하여 1867년 이들을 국가운영의 파트너로 새롭게 맞아들였다. 이러한 권력구조 개편은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의 불만을 샀으며 이것이 제국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사공이 둘인 배는 정책 결정에 어려움이 강해졌다. 특히 독일계와 마자르계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외교정책을 설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867 ~ 1914 50여년의 기간 동안, 이중제국의 운영을 위한 두세력간의 적절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점차 비외교적인 해결책들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회적 다윈주의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인들은 국가간의 무장투쟁, 전쟁을 중시하였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긴장관계에 있던 양측은 서로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다.

정치 문제의 난맥상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제국이 더 많은 슬라브 계를 끌어들여서 마자르 엘리트 들의 권력을 희석할 필요도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남부에 기반을 두는 슬라브 인들이 더 늘어난다면 제국의 독일계 지배층은 슬라브와 마자르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으며, 이렇게 내부적인 요인을 대외정복활동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다양한 방식의 변주곡이 존재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가졌던 또 다른 두려움은 남부의 슬라브 계가 세르비아 주도의 범슬라브주의에 이끌려 제국에서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으며, 이 때문에 콘라드 폰 호첸도르프를 주축으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알렉젠더 호요 같은 정치가들은 세르비아가 군사적으로 정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하기 이전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1차대전이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반면, 프란츠 페르디난드나 프란츠 요셉을 비롯한 정부의 주류는 세르비아 문제를 비롯하여 다민족제국의 내포하는 문제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점차 강경파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3. 제국주의

역사적으로 본다면, 전쟁의 경제적 원인들은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기인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19세기 말까지 자원획득, 시장확보, 인적-공간적 자원 확보를 광대한 해외식민지에 의존하고 있던 반면,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은 극동과 아프리카 등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식민지들을 많이 획득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보존자원이 급속도로 고갈되었고 이로 인하여 무역수지상의 불균형이 서서히 심화되어 각국은 더욱 보존자원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지리상의 발견이 끝나고 식민지 확보가 한계에 도달하자 이런 경제적 분쟁들은 서서히 유럽 초강대국간의 마찰의 불씨로 변하게 된다.

4. 식민지 확장

Image:WWI.png

녹색은 연합군. 오렌지는 동맹군. 회색은 중립.

1880년대부터 4반세기에 걸쳐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전역에 유럽의 식민지를 건설해나갔다. 비스마르크가 정계를 주도하던 시기와 달리 그의 후계자들은 해외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으며 아프리카와 태평양 일대에 구축한 독일의 식민지들이 영국의 전략적, 상업적 이해관계와 충돌하자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게 가시적인 적대행동을 하는 것보다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부차적인 결과로 프랑스는 유럽의 문제보다는 독일의 간섭이 없는 해외식민지를 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빌헬름 2세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의 후계자가 된 인물은 독일제국 최후의 수상으로 영국과 독일의 긴장관계를 완화하려 노력한 레오 폰 카프리였다. 1894년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독일의 새로운 식민지 정책은 유럽 강대국들이나 일본과의 관계에 마찰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영국간의 동맹을 성사시키며 다시금 유럽 외교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독일이 프랑스에서 모로코가 독립하는 것을 지원하자 영국은 프랑스의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로서 1905년 탕헤르 위기를 극복하는데 프랑스를 지원했으며 1911년의 아가디르 위기 또는 2차 모로코 사건에서도 독일해군이 모로코를 도운 것은 영국-프랑스 동맹에 대한 새로운 시험이었다. 이 상황에서 독일은 전략적으로 "패배"를 당했으며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수준을 넘어서 대부분의 다른 유럽국가들에게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질적으로 빌헬름와 비스마르크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외교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빌헬름 2세는 외교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힘을 행사해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는 면에서 비스마르크에 훨씬 못미쳤다.

5. 동맹체제의 그물

발칸반도에서의 동맹관계

유럽 각국은 복잡한 동맹체계로 얽혀있었다.

1839, 런던 협정. 벨기에의 중립.
1879,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82,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94, 프랑스-러시아 동맹
1904, 영프 협약(entente ; 동맹보다 낮은 수준의 협력)
1907, 영러 협약 삼국연합

러시아가 발칸반도 국가들과의 협정으로 "남부 슬라브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섬.

이러한 조약들의 복잡한 연결망은 정치가들의 사소한 오해를 전쟁으로 바꾸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약소국의 동원령 발동이라는 작은 불씨도 이런 연쇄반응을 거치고 나면 초강대국간의 핵폭발을 낳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정치 지도자들이 정상적으로 위기를 의논하기만 했어도 지엽적인 분쟁으로 종료되었을 작은 사건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통해서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는 엉뚱한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07.28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07.29 : 러시아가 세르비아와의 조약을 이유로 동원령 선포
08.01 : 독일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때문에 러시아에 선전포고
08.01 : 독일이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참전하리라 예상하고 프랑스를 대상으로 동원령 선포.
08.01 : 프랑스도 독일에 대응하여 프-러 동맹에 따라 동원령 선포.
08.03 :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08.04 :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슐리펜 계획에 의함)
08.04 : 영국이 1839년 런던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그에 따라 브리티쉬 커먼웰스 전체가 독일에 선전포고(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뉴폰틀랜드,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08.23 : 일본이 영일 동맹에 의거 독일에 선전포고

6. 군비경쟁

"군사적 긴장상태를 고조시키는 쳇바퀴, 멸망으로 이끄는 지름길, 군비경쟁은 적대행위를 고조시키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 데이빗 스티븐슨

"전쟁의 승리로 통하는 창문, 1차대전을 가장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게 한 징후" - 다비드 헤르만

"만약 1904년이나 1911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했다면 전쟁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가들 중에는 독일의 해군력 증강으로 촉발된 영-독간 마찰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영국의 압도적인 해군력과 대등한 전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았으나 양측의 톤 비례는 1900년 3.7:1에서 1910년 2.3:1로, 1914년에는 2.1:1까지 좁혀졌다. 퍼거슨은 "영국이 지속적으로 해군전력에서 앞서나가고 있기에 1차대전의 원인으로 영-독간 해군군비경쟁을 원인으로 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으나 독일해군이 규모상의 격차를 절반수준까지 좁히며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는 점과 영국은 방대한 해외식민지들의 보호와 급성장 중인 미해군을 포함해서 라이벌들에게 우위를 차지하려면 그 수준보다 더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퍼거슨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7. 크리스마스 종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신속한 대규모 결전으로 전쟁 자체는 크리스마스 까지 끝이 날 것이라는 것은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예측이었으며 이 전쟁이 유럽 문명 전체를 끝없는 미궁으로 몰고 가리라는 예측은 일반인들에게는 예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다만, 당대의 군사이론가들 중에는 좀 다른 예측도 있었는데 훗날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는 이반 블로크가 주장한 "산업사회에서의 전쟁은 많은 유혈과 심각한 소모전을 야기하고 마침내 혁명이 일어나게"되리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군부나 바전론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론이었다. 닐 퍼거슨은 전쟁 이후 단기전에 대한 신뢰감은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작전계획을 작성하는 이들은 장기전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으며 특히 러시아와 독일 황제간의 윌리-닉키 전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독일의 전략가들은 그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참전국 정부들은 선전선동을 위해서 이런 비관적 예측들을 전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공세에 참여하도록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성을 약화시켰다.

8. 공세 중시형 전략과 전쟁의 사전시간계획 작성

당대의 많은 군사전략가들은 공세를 극단적으로 중시했다. 전세대의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에 더 가치를 두었으며 이상적인 전쟁을 방어로 시작하여 공격으로 끝나는 것이라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 참모본부의 의견은 기습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이점들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선전포고와 동시에 공격을 하는 방식을 중시했다. 따라서 외교적인 대화채널은 더욱 좁혀졌으며 전략을 입안하는 이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동원령을 선포해서 방어측이 정상적인 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격을 시작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동원계획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명시되었으며 일단 동원령이 선포될 경우 군대와 국가 자체의 조직체계가 심각한 피해를 입을 각오없이는 취소할 수 없으며 일단 동원령이 선포된 뒤로는 외교적인 대화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9. 슐리펜 계획

Map of the Schlieffen Plan and planned French counter-offensives

동맹관계에 있는 적을 양쪽에서 맞아야 한다는 전략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작성된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방대한 예비군전력을 동원하는데 6주가 걸린다는 전제하에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것을 기초로 일단 프랑스를 격파한다면 독일은 열차로 전력을 동부전선에 집중시켜서 러시아를 격파하는 것을 계획의 골자로 했다. 1906년 은퇴할 때에도 알프레드 그라프 폰 슐리펜 은 계획이 잘 짜여져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조직력의 약점을 노출시키자 계획의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슐리펜 계획의 구성은 신속하게 독일이 동원병력을 집중시키고,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 벨기에를 급습하여 그곳을 통해 프랑스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다. 슐리펜은 상대를 압도할 정도의 대규모 전력을 집중시켜서 오른쪽 측면을 돌파한 다음 돌파전력 북부의 최소 전력만을 남긴채 소수 방어병력만 남아있는 동부전선으로 주력을 회군하도록 했으며 당시 슐리펜 계획은 가장 철저하게 준비되고 정치가들도 명확하게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군사전력이었다.

슐리펜의 뒤를 이은 헬무트 폰 몰트케는 돌파중 우익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계획을 좀 더 방어적인 형태로 수정했고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벨기에의 Liege에 포병사격을 가한 다음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계획은 여전히 철도 수송과 화력의 집중에 중점을 두었으며 방어계획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이 계획의 특징은 독일군이 반드시 전쟁 초기 단계에 기습작전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와중에 러시아가 동원부대를 소집하고 독일이 소련군에게 짖밟힌다 하더라도 그에 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계획을 취소하고자 했지만 최고작전계획을 포기하고 새롭게 계획을 작성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역사적 사건들

1. 크리미아 전쟁(1854-1856)

영국과 프랑스, 오스만 제국의 연합군이 러시아에게 승리를 거둔 크리미아 전쟁은 유럽의 외교적인 구조를 변화시켰다. 오스트리아는 1848년 혁명때 이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뉴브강에서 콘스탄티노플에 걸친 지역에서 러시아의 위력에 두려워하면서도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서 연합군을 지지하였고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인 고립상태에 놓이게 되어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과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의 범-슬라브 주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

2. 보불전쟁 (1870?1871)

1차대전의 직접적인 원인들 중의 많은 부분은 1870~1871의 보불 전쟁의 전개와 결과를 확인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전쟁의 결과로 독일제국이라는 높은 군사적 잠재력과 공업력을 겸비한 강대한 제국이 새롭게 유럽에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의 민족주의, 국가적 역량, 경제적 능력, 인구증가에 의한 생활공간 확보에 대한 욕망들은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을 촉발했고, 특별히 영국과 독일간의 해군 군비경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쟁의 배상으로 독일은 프랑스의 영역 일부인 알사스-로렌을 합병했고 프랑스는 이 사건으로 강한 복수심을 품게되었다.

전쟁 이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해외 식민지 확장에만 신경쓰도록 유도했으며 1884년, 영국-포르투갈의 서아프리카 협약으로 이루어진 프랑스-독일간의 식민지에 관한 이익조절은 1885년의 프랑스의 반제국주의적 쥴리 페리 정부가 무너진 뒤로 중단되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의 패배에서 빠르게 회복되었으며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군사력을 다시 강화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군사력이 강화되기 전에 예방적인 전쟁을 계획했으며 이를 통해서 프랑스의 재무장을 약화하려고 하였으나 삼제동맹은 독일보다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비스마르크의 실각으로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3. 빌헬름2세의 등장

German Chancellor Otto von Bismarck.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지휘아래 독일은 유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구축하고 러시아와도 외교적인 보조를 맞춰나갔다. 비스마르크는 동맹을 통해서 프랑스를 고립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으며 1860년에 새롭게 탄생한 제국이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적어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기 까지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외교적 관계는 유럽에서 평화를 유지했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집권하고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발휘하기를 원하면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이 발생했다. 1890년 투표에서 역대의 황제들이 지속해온 정책의 결과로 중도좌익적인 정권이 주도적인 의석을 차지하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사임을 계획했고 그와 함께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외교적 구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독일은 1887년 러시아와의 조약을 재갱신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게다가 1898~1900동안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할 만큼 강대한 해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으로 영국과의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결과적으로 1904년 영-프 우호조약이 맺어지고 1907년에는 다시 러시아가 가입한 3국 연합이 결성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4. 영-독 건함 경쟁

Kaiser Wilhelm II.

빌헬름 2세

빌헬름 2세는 영국해군의 압도적인 제해권에 도전할 정도로 강대한 해군의 지원이 있어야 독일제국은 식민지 쟁탈전에서 보다 발언력을 강화하고 영국의 영역에 침투해들어간 상업권을 보다 지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폰 틸피츠의 지도하에 독일은 대대적인 건함경쟁에 돌입하였으며 1898~1912년간 군함법을 통하여 영국해군에 도전할 정도의 대규모 해군력을 건설했고, 영국은 그에 반발하여 독일에 대응할 육군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랑스-러시아와의 동맹관계를 강화시켰다.

영국의 제1해군경 재키 피셔는 1905~1910에 걸쳐서 독일의확장에 대응할 대규모 건함에 돌입하였으며 1906년에 건조된 혁명적인 전함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영국과 독일은 거의 동일한 조건에서 새로운 군비경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양국은 대대적으로 전함과 잠수함을 비롯한 대규모 해군을 구축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이 대규모 건함경쟁은 육군에 투자될 독일의 군비를 분산시켜 패배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역사가들의 원인분석

- 1차대전 당시에도 수많은 이들이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큰 피해를 낳은 이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시도했었다. 가장 먼저 원인을 규명하려던 시도는 헨리 베르그송의 "전쟁의 의미(The meaning of the War, Life & Matter in Conflict, 1915, London)"였으며 연합국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전적으로 독일에 떠넘겨서 비난하는 수많은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1920년대 말이 되자 독일에 대한 비난일색이던 상황은 점차 변하여 1930년대로 이어지면서 학계는 1차대전의 원인을 연합국 편에서도 찾아내기 시작했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가혹함을 지적했다. 시드니 훼이나 헤리 엘머 반즈 같은 이들은 독일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며 베르사이유 체제가 1차대전의 원인을 전적으로 독일에 묻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이들의 주장은 독일 정부가 연합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 2차대전 이전까지 역사가들은 동맹 밀약, 공세의 속도, 경직된 군사계획, 다위니즘, 국가간 외교분쟁의 해결책 미비등의 다양한 원인을 지적해나갔으며 수십년간 이런 원인들의 복합적인 결합이 전쟁을 낳았다는 것이 요하임 레마르크나 폴 케네디등의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주류 역사계가 지지한 일반적인 이론이었다. 한편, 연합국들은 일반적으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난하였고 "전범국가 독일"이라는 개념은 매우 감정적인 대응이 되어 그에 반발한 나찌당이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 1961년, 프리츠 피셔는 자신의 책에서 독일이 전쟁의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셔는 독일 정부가 1912년 사민주의 세력이 확대되자 과도한 확장정책을 펼쳤으며 내부의 문제를 외부확장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그의 연구는 베드만 홀위그가 독일에 전쟁의 원인을 돌린 "September Trogramme"에 기초를 두었으며 학계와 독일 정계에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초기에 이런 주장들은 게하르트 리히터를 비롯한 독일 보수역사가들에게 부정확하고 부당한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그 이후, 1960년대에 1차대전의 원인에 관한 새로운 이론들이 좀 더 등장했다.

서독의 다수 학설로 지지받게 된, 안드레아스 힐 그루버의 이론은 1914년의 "계산된 위험"설로 독일이 1914년에 영-프-러 간의 3국 연합을 파괴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부추켜서 세르비아에서 제한적인 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론으로 힐그루버는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가 발칸반도에서의 분쟁에 간섭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고 주장했으며 독일측이 발칸반도에서의 분쟁으로 발생할 외교적 전략적 위험을 오판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 또 다른 이론은 A.J.P. 테일러의 "철도 이론"으로, 강대국들이 대규모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세력균형을 깨고 우위를 점하기를 원했다고 지적한다. 테일러는 지속적인 군비경쟁과 대규모 병력 동원의 시간계획,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동들이 결합되어 위험을 증대시켰다고 보았으며 1914년 여름에 세르비아 사태에서 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 잠재적인 적국보다 빠른 속도로 동원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결집시켜 공세에 들어가려는 의도의 경합이 위험을 증대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테일러의 '철도 이론'은 핵확산 금지와 핵보유국 간의 탄두보유양 감축운동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 한편, 아르노 메이어는 1967년, "베를린 전쟁 당"이라는 이론을 통해 모든 참전국들이 독일만큼이나 전쟁을 준비했고 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독일의 주류학계에서는 외면당했다. 이에 대하여 새뮤얼 R. 윌리엄슨은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1차대전의 책임이 더 크다고 1990년 지적한 바 있으며 니얼 퍼거슨도 재키 피셔경이 영-독간 해군군비경쟁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최근에는 데이빗 프롬킨이 1차대전의 원인을 프러시아 귀족계층이 주도한 독일의 군국주의적 전통에 기초하였다고 주장하여 원인을 독일쪽에 집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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