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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모세 다얀

네 차례의 전쟁과 모세 다얀


다얀 일가의 저술들

모세 다얀이라는 이름은 이미 여러 번 언급되었다. 투사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왼쪽 눈을 시커먼 안대로 가린 그의 모습은 서부영화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독립전쟁에서부터 욤 키푸르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모두가 다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은 그를 세계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은 그를 끝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만큼 심한 부침을 경험한 정치인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다얀 집안 사람들은 책도 참 많이 썼다. 우선 그의 아버지 쉬무엘 다얀(Shmuel Dayan)이 쓴 책이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 1961)", "요르단 강 연안과 갈릴리 바다에서(On the Banks of the Jordan River and the Sea of Galilee, 1959)", "이스라엘의 개척자들(Pioneers in Israel, 1961)" 등 세 권이고, 그의 어머니 드보라 다얀(Dvorah Dayan)이 쓴 책이 "행복과 슬픔 속에서(In Happiness and Grief, 1957)", "개척자(Pioneer, 1968)" 등 두 권이다. 그의 첫 부인 루스 다얀(Ruth Dayan)이 쓴 책으로 "루스 다얀의 이야기(The Story of Ruth Dayan, 1973)"가 있고, 그의 딸 야엘 다얀(Yael Dayan)은 "나의 아버지, 그의 딸 (My Father, His Daughter, 1985)"이라는 책을 썼다. 모세 다얀 스스로도 회고록 한 권(The Story of My Life, 1976)과 "성경과 함께(Living with the Bible, 1978)", "시나이 전쟁일지(Diary of the Sinai Campaign, 1956)" "돌파(Breakthrough, 1981)" 등의 책을 남겼다. 순전히 자기 집안 이야기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썼고, 팔아먹기도 엄청나게 많이 팔아먹었다. 번역된 책의 제목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위에 적은 책 중 몇 권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거짓말과 참말을 가려내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다. 그밖에 모세 다얀에 대한 전기가 몇 권(전세계적으로 정확히 몇 권인지는 나도 모른다) 있고, 다얀의 여자관계를 추적한 기사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이 가족들은 쉬무엘 다얀과 모세 다얀, 야엘 다얀의 3대에 걸쳐 이스라엘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정도면 이 집안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의 아버지 쉬무엘 다얀이 쓴 책들은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선구자들의 이야기이다. 쉬무엘은 1890년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가난하지만 경건한 유태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가 된 쉬무엘은 우연한 기회에 "팔레스타인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라는 유태 개척자 모집 팜플렛에 접하게 되고, 1908년 6월 러시아 화물선을 타고 팔레스타인 야파 항에 도착한다.

모세 다얀의 어머니의 스토리는 한결 더 드라마틱하다. 쉬무엘과 동갑으로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드보라는 15세 때인 1905년 짜르에 대항한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했다. 1911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모험을 찾아 간호원으로 발칸전쟁에 참전하지만, 그녀는 곧 이 전쟁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유태인으로서의 입지를 자각하게된 것이다. 1913년 그녀는 키에프 대학을 때려치우고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Lovers of Zion)"운동으로 편지를 낸 후,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 한 채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이 집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앞서 소개한 이가엘 야딘 부모와 너무도 비슷한 줄거리에 놀라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전형적인 초기 유태인 이민역사의 한 장면인 셈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러시아에서 이주한 유태인 이민의 다수가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노동당이 이스라엘 역사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초기 유태 개척자들의 삶은 비참한 것이었다. 동부유럽에서 주로 양복점이나 생선가게, 야채가게를 하던 사람들이 황무지에서 농사를 지으려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고, 파리와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유태인에게는 누구도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3년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쉬무엘이 정착한 곳이 갈릴리 바다 남단의 데가니아(Degania) 키부츠였다. 이스라엘 최초의 키부츠인 이곳에서 그는 유태인 정착촌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피나게 일했다. 그러던 중 쉬무엘은 1913년 데가니아 키부츠를 방문한 드보라와 사랑에 빠지고 다음 해 결혼에 성공한다.

1915년 5월 4일 두 사람 사이의 첫 아들 모세가 태어난다. 모세 다얀은 데가니아 키부츠의 첫 아이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키부츠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기도 했다. 모세는 키우기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밤에는 잠도 안자고 울기만 했고, 병치레도 잦았다. 어머니 드보라는 키부츠의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요르단강변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모세가 세 살 때는 폐병까지 치러내야 했다. 모세가 네 살 되던 해에는 쉬무엘 부부가 정착한 데가니아 B 키부츠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쉬무엘은 이를 포기해야했다. 자신이 건설한 정착촌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떠나야 했던 쉬무엘은 1년 후 젊은 일꾼들을
이끌고 그 자리로 돌아가 복구작업을 시작한다. 이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레비 에쉬콜(Levi Eshkol)이었다.

소년시절

1921년 다얀일가는 나할랄(Nahalal)로 이주한다. "젊은 노동자당(Ha-poel ha-Tzair, Young Workers)"의 일원으로 최초의 모샤브(moshav, 소규모 자영 공동농장)를 건설하는데 참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21명의 개척자들은 "오직 스스로의 노동에 기초하여 살며, 말은 히브리어만을 사용하고, 필요할 때 서로를 돕는다"는 모샤브의 원칙을 확립한다. 이곳에서 모세는 메슐람 할레비 선생이 지도하는 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그 당시의 모세는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하는 다소 밥맛없는 아이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자존감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이 아이들 중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를 따르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학교시절 주로 유태인들보다는 이웃의 아랍 소년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 기간 중 아버지 쉬무엘의 정치활동은 점점 활발해지고, 기금모금을 위해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다. 팔레스타인 유태사회를 이끄는 노동자당의 일원이 된 것이다. 늘 밖으로 도는 남편 덕에 농장 일과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드보라는 이 모든 일을 잘 감당해내는 한편 "노동 여성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한다.

10세 되던 해 모세 다얀은 최초로 총을 잡는다. 모샤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정착을 방해하려는 아랍인들에 대항해야 했고, 모든 젊은이들은 일찍부터 사격을 배워야했다. 1929년 아랍인들의 폭동으로 많은 유태인들이 희생되면서부터 모세 다얀은 도브 예르미야(Dov Yermiya)를 비롯한 또래들과 함께 총을 들고 말을 탄 채 나할랄 영역을 순찰하고, 이 지역을 넘보는 베드윈족을 쫓아내기 시작한다. 1932년에는 모세 다얀 일가의 바로 이웃집에서 아랍인들이 던진 폭탄이 터져 일가족이 사망한다. 아랍인들과의 투쟁은 일상생활이 되어갔다.

1934년 가을 다얀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요르단 강과 여리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곳곳에서 아랍인들과 마주치고, 불법 유태 이민자로 오인되어 아랍경찰에 체포되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이 여행은 값진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신문사에 알리자는 황당한 구상을 가지고 세 소년이 찾아간 곳이 다바르(Davar) 신문사였고,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든 사람이 잘만 샤자르(Zalman Shazar)라는 이 신문의 부편집장이었다. 샤자르는 1963년부터 73년까지 이스라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소년들의 이야기가 1934년 9월 17일자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일찍부터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던 모세 다얀은 이 무렵 루스(Ruth Schwartz)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야딘의 경우처럼 다얀도 루스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루스의 부모는 딸이 최소한 대학을 졸업한 청년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부모의 반대가 별 장애가 안되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같다. 1935년 20세의 모세 다얀과 16세의 루스는 결혼에 성공한다. 이들의 결혼식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사회를 이끌던 지도자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군인의 길

사위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했던 장인 즈비 슈와르츠 덕분에 모세 다얀은 결혼직후 아내와 함께 유럽여행을 한 후, 런던경제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진학한다. 그의 진학을 도와준 같은 학교의 해롤드 라스키 교수와 하임 바이츠만(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은 모세 다얀에게 캠브리지 대학의 농학과에서도 공부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공부는 그의 적성이 아니었다. 6개월만에 공부를 그만두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세 다얀은 훗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었으나, 고교 졸업장이 없어 런던경제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있는 변명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농장에서 일을 하던 모세는 1937년 영국군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임무는 대영 제국의 생명선 중의 하나인 이라크 정유회사의 파이프라인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 해 12월 모세 다얀은 하가나의 부름을 받고 지휘관 훈련반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평생동안 적과 동지를 교차하는 이갈 알론(Yigal Allon)을 처음 만나게 되고, 당시 하가나를 지휘하고 있던 이츠하크 사데의 충실한 학생이 된다. 하가나 요원으로 일하는 동안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국군 정보장교였던 윈게이트 대위였다. 늘 한 손에 성경책을 끼고다니던 윈게이트는 보통 사람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부임과 동시에 시오니즘 운동에 심취한 그는, 유태 지도부를 찾아가 "당신들의 전쟁을 돕고 싶다.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에 내 인생을 바치고 싶다"며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던 윈게이트의 개신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던 유태 지도부는 최초에 그를 영국군의 첩자로 의심한다. 그러나,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오니즘 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성은 이스라엘군 건군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인행각은 여러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격작전을 마친 후 모세 다얀을 비롯한 부하들이 오믈렛과 감자요리를 만들고 있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 발가벗은 채 성경책을 읽으며 양파를 날것으로 씹고 있기도 했다. 훗날 모세 다얀은 "윈게이트는 정상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기준은 늘 보통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군사적 천재였을 뿐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이갈 알론과 모세 다얀은 윈게이트로부터 선제기습공격의 원리를 습득했다.

1939년 5월 17일 유태인 이민을 제한하는 영국 정부의 백서(White Paper)가 발표되면서, 하가나를 비롯한 지하조직과 영국당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0월 3일 하가나 요원들을 교육하고 있던 모세 다얀은 영국군에 의해 불법무기소지혐의로 체포되어 악명 높은 에이커 감옥에 수감된다. 변호인단 중에는 그의 장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변호인단은 나치 독일이 발흥하고 있는 마당에 아군이어야 할 유태인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재판부를 설득하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그리고, 모세 다얀의 감옥생활은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41년 1월 전쟁의 불길이 중동으로 확산되면서 영국군은 유태 지하운동조직들과의 타협을 모색하고, 이에 따라 모세 다얀이 석방된 것이 1941년 2월 16일의 일이었다.

왼쪽 눈을 잃고

감옥에서 풀려난 모세 다얀은 이츠하크 사데에 의해 새로 창설된 정예부대 팔마하의 두 명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선임된다. 다른 한 명은 이갈 알론이었다. 그들이 받은 첫 명령은 영국군의 시리아 공격에 참전하라는 것이었다. 1941년 6월 7일, 모세 다얀은 호주병사 10명, 유태인 5명, 아랍인 한 명으로 구성된 영국군 정찰조의 일원으로 적후방에 침투한다. 2-3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아랍 경찰서 건물에 진입한 모세 다얀은 뒤늦게 그 건물이 적군인 비시프랑스군(나치 독일에 항복한 비시정부의 군대. 연합군으로 참전한 자유 프랑스군과는 다르다)의 사령부임을 깨닫는다. 다얀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주력부대가 빨리 도와주러 오는 것뿐이었다. 총격전이 오간 후 경찰서 건물을 포위한 비시프랑스군 병력을 확인하기 위해 망원경을 집어든 모세 다얀의 얼굴로 총탄 하나가 날아왔다. 이 총탄이 망원경을 관통하면서 깨어진 망원경 조각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총탄은 동시에 다얀의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찢어놓았다. 다얀은 곧 의식을 잃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뒤였다. 후퇴하려는 동료들은 다얀에게 "응급처치를 위해 차라리 비시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유하지만, 다얀은 거부한다. 죽으면 죽었지 다시 감옥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6시간 후 영국군 본진이 도착함에 따라 모세 다얀은 생명을 건진다. 장시간의 외과 수술 끝에 생명은 건졌지만, 왼쪽 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쪽 눈을 잃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내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절망 중에 다얀은 "과연 누가 눈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고용하겠는가? 아이를 더 갖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절규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전혀 달랐다. 그의 이름은 이미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수많은 전쟁영웅들이 탄생했지만, 다얀만큼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왼쪽 눈의 검은 안대는 신문기사 이상의 웅변이었고, 이것은 모세 다얀의 상징이 되었다. 그에게 맡겨진 새로운 임무는 영국정보부와 함께 지하운동 조직의 통신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영국정보부가 장비와 돈을 댔고, 다얀의 조직은 독일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연합군에 알리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부터 1948년까지는 루스와 모세 다얀 부부에게 있어 드물게 행복한 시기였다. 모세 다얀은 비교적 안전한 업무에 종사했고, 나할랄 모샤브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이 시기에 이르군과 레히 조직이 격렬한 반영투쟁에 나서고 있었음에 반해 하가나는 온건한 노선을 택해 영국과 협력하는 길을 걷고 있었던 까닭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기간중 모세 다얀이 이르군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3년 말부터 이르군과 레히는 하가나와의 연합을 꾀하고 있었고, 모세 다얀이 자신들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믿은 이르군 지도자들은 모세 다얀과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이르군의 지도자들은 모세에게 반영투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모세 다얀은 우익지도자들과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었지만, 반영투쟁에 나서거나 하가나에서 탈퇴할 수는 없었다. 반영투쟁에 직접 나서는 것은 곧 하가나에서의 축출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다얀은 은신 중인 이르군의 최고지도자 메나헴 베긴도 만났다. 다수의 하가나 지도자들이 베긴을 괴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 반해, 다얀은 베긴으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베긴도 마찬가지였다. 베긴은 다얀이 시리아전쟁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잘난 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훗날 베긴은 다얀을 하가나의 가장 훌륭한 장교 중의 하나였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전술한 계절 작전(하가나가 이르군과 레히 요원들을 잡아 영국군에 넘겨준 것) 기간 중 다얀 역시 하가나의 일원으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얀은 다른 하가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서 평생동안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창피스러운 기억이었던 것이다.

1946년 12월 모세 다얀은 스위스 바젤에서 있은 제22차 시오니스트 공의회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아버지 쉬무엘은 정식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이곳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은 영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이스라엘 건국을 주장했고, 중립적 입장을 지키던 하임 바이츠만은 영국과의 연대에 기초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독립전쟁과 동생의 죽음

1948년 독립전쟁 직전까지 이스라엘군 내에서 모세 다얀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 그의 왼쪽눈 부상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주로 아랍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는 일이 맡겨졌다. 심지어 1948년 4월에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하이파에서 추가적인 약탈을 방지하는 임무를 맡기까지 한다. 일종의 전투 뒤치다꺼리 역할을 맡은 것이다. 말이 약탈방지지 실제로는 약탈주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임무였다. 아랍인들이 버리고 간 차량이나 생활필수품들을 수집하여 분류하고 이를 재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가 분류한 차량들 중 가장 쓸만한 것들은 이스라엘군으로 보내졌고, 그보다 못한 것들은 유태인 정착촌으로 보내졌다. 왕년의 전쟁영웅이 하기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그런 한심한 임무를 맡긴 사람은 바로 벤-구리온이었다. 훗날 벤-구리온은 "내가 독립전쟁 초기에 모세 다얀의 진가를 알지 못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고 회상하며 모세 다얀을 처음부터 중용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모세 다얀이 전투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동안 이가엘 야딘이나 이갈 알론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같은 달, 어머니 드보라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조릭 다얀(Zorik Dayan)이 라마트 요하난 키부츠를 방어하던 중 아랍인들의 총에 맞아 전사한다. 동생의 사망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간 모세 다얀은, 동생을 죽인 이웃마을 드루제의 아랍인들로부터 협상을 제안받는다. 모세 다얀은 의외로 선선히 이 협상제의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제 친구가 되자. 시리아군으로부터 탈퇴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시리아군이 오면 당신들을 열등 부족으로 대우할 것이고, 당신들에게 아무런 안전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아랍인들을 설득한다. 드루즈 마을의 아랍인들은 독립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모세 다얀이 중동평화협상에 참여하는데 좋은 거울이 되었다.

시리아전에서

1948년 5월 독립전야 모세 다얀에게도 기회가 왔다. 신설된 제8기갑여단장으로 임명된 이츠하크 사데는 지휘관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거의 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세 다얀 중령이었다. 처음 모세 다얀에게 맡겨진 임무는 신설 여단에서 대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대대조직이 마쳐지기도 전에 다얀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시리아군은 요르단 계곡의 유태인 정착촌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을 책임질 지휘관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다얀은 대대조직을 뒤에 남겨놓은 채 포위되어 있는 유태정착촌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가 현지에 부임했을 때 요르단 계곡을 담당하는 골라니(Golani) 여단은 이미 붕괴직전의 형편에 놓여 있었다. 골란 고원에서 쏟아져내려온 시리아군은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키부츠들을 공략하고 있었고, 이스라엘군은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 고전하고 있었다. 다얀과 동행한 1개 중대규모 병력은 대부분 전쟁경험이 전무한 16-17세의 소년들이었다. 시리아군의 대공세는 불과 20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같은 시각 텔 아비브에서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요르단 계곡의 키부츠를 떠나온 대표자들이 벤-구리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다얀이 태어난 데가니아 키부츠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벤-구리온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작전참모부장 이가엘 야딘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도 "모세 다얀이 갔으니, 용기를 내시오"라는 것밖에 없었다.

5월 20일 오전 4시 15분.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시리아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바주카포와 화염병, 소총이 주종이었고, 사용가능한 중화기는 1870년의 보불 전쟁에서 쓰이던 불란서제 65밀리 대포 두 문뿐이었다. 이 대포는 이스라엘군이 보유한 총 4문의 대포 중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시리아군 탱크들이 데가니아 키부츠의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던 이스라엘군이 탱크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넣고, 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저항에 놀란 시리아군이 30여 구의 시체를 남겨둔 채 퇴각했다. 믿어지지 않는 승리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다얀은 야음을 틈타 9명의 특공대를 시리아군 진영으로 침투시켜 적의 대포들을 완전히 파괴했다. 심야에 기습을 받은 시리아군은 혼비백산했다. 대규모 공격을 받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당황한 시리아군은 동부지역으로 후퇴했다. 적의 허를 찌르는 역습은 이 때부터 모세 다얀의 주특기가 되었다.

제89공격대대

모세 다얀이 텔 아비브로 돌아왔을 때 그의 제89공격대대에는 다얀의 명성을 듣고 몰려든 지원자들로 넘쳐났다. 심지어 다른 부대에서 탈영하여, 모세 다얀 휘하로 들어온 병사들이 있을 정도였다. 곧 4개 중대가 조직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도브 그라네크가 이끈 레히 출신의 전직 테러리스트들로 구성되었다. 다얀에게는 이츠하크 사데의 제8기갑여단과는 별도로 적후방에 침투하여 목표물을 타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다얀의 방침에 따라 제89공격대대에는 계급도, 뱃지도 없었고, 군복도 제멋대로였다. 사령부에서는 정규적인 훈련을 실시하도록 지시했으나, 부대원들이 불평하자 다얀은 사령부의 지시를 무시했다. 심지어 경례조차 정말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말라는 식이었다. 찝차가 필요하면 다른 부대에서 훔쳐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기는 충천했고, 주어지는 임무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다얀의 지론은 이스라엘군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스라엘을 찾아간 한국기자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이런 군대의 모습이다.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는 이런 이스라엘군의 모습을 "개판 5분전" 또는 "산적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즈음 다얀의 부대에 모세 다얀과는 상극을 이루는 부대대장이 자원해 왔다. 그의 이름은 요하난 펠츠(Yohanan Pelz)였다. 전직 영국군 장교인 펠츠는 규율과 훈련을 중요시하는 전형적인 군인이었고, 다얀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펠츠가 아무리 규율을 확립하려 해도, 다얀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펠츠의 명령과는 반대로, 다얀은 병사들이 무전기를 단 찝차를 타고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무전기를 고장낸 채로 부대로 복귀하자, 펠츠는 다얀에게 항의한다. 그러자 다얀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를 귀찮게 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무전기나 고치도록 하게. 나하고 싸울 에너지 정도면 찝차를 스무 번은 고칠 수 있을 걸세"라고 웃어넘겼다.

이 시점에서 터진 것이 알타레나호 사건이다. 텔 아비브 북부에 정박한 이 배에는 수많은 무기와 베타르 출신의 자원자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벤-구리온은 이츠하크 사데에게 이 배의 무장해제를 명했고, 사데는 모세 다얀에게, 다얀은 펠츠에게 작전을 명령한다. 펠츠는 명령을 거부했다. "저는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모든 가족을 나치대학살의 와중에서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동족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의 양심에 반하는 일입니다." 펠츠의 결심은 확고했고, 사데나 다얀도 이를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모세 다얀의 지휘하에 유리 바르-온의 중대가 이 악역을 맡게 된다. 이 사건으로 14명의 이르군 요원이 사망했고, 이르군은 해체된다.

알타레나호 사건 직후 군사령부로 호출된 다얀에게는 데이비드 마커스 대령의 시신을 운구하는 책임이 맡겨진다. 미국에 간 다얀은 이 기간을 허비하지 않고, 웨스트 포인트에서 2차대전시의 미국 특수부대 지휘관들을 만나 공격원리를 습득한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적고 적에게 경계심만 줄 수 있으므로, 공격 1-2일 전에는 정찰대를 내보내지 말 것. 공격 시에는 단선으로 목표를 직접 타격할 것. 절대 멈추지 말 것. 화력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사용할 것."

7월 8일 미국에서 돌아와 공항에 내린 그는 곧바로 전쟁터로 투입된다. 28일간의 휴전이 끝나고 전투가 재개된 것이다. 미국에서 배운 원리들은 바로 실전에 적용되었다. 7월 10일 제89공격대대를 이끌고 로드공항을 공격한 다얀은 그 여세를 몰아 라믈(Ramle)까지 점령한다. 이 작전은 텔 아비브 주변의 안전을 확보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로드 작전의 승리 직후 몇 시간 눈을 붙인 다얀은 이가엘 야딘 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네게브 사막을 돌파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받는다. 펠츠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작전 투입이 가능한 병사는 총 400명 중 221명에 불과했지만, 다얀은 남부전선에서의 임무도 성공리에 끝마친다. 그 후의 다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 전선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다얀을 예루살렘 전선 지휘관으로 점찍고 있던 벤-구리온은 그를 에치오니(Etzioni) 여단장으로 임명하여 예루살렘으로 투입한다. 제89대대 병사들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벤-구리온에게 "만약 다얀을 예루살렘으로 보낸다면 우리도 모두 따라갈 것"이라고 탄원하지만, 벤-구리온의 결심도 확고했다. 벤-구리온은 모세 다얀을 따라가기 위해 가장 위험한 예루살렘 전선으로 갈 것을 마다하지 않는 부대원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예루살렘 전선과 종전

7월 23일 모세 다얀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구시가는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다얀은 즉각적인 행동을 원했지만, 에치오니 여단은 오랫동안 지속된 시가전으로 지쳐 있었고 휴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다얀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기습을 즐겨하는 그의 명성을 전해들은 아랍군은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맡겨진 일은 외교적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예루살렘의 아랍군 지휘관인 압둘라 엘-텔 중령과 다얀 사이의 지루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고, 다얀은 요르단의 압둘라 왕을 무려 열 두 번이나 대면해야 했다. 마침내 1949년 4월 3일 이스라엘과 요르단간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군은 큰 변화를 겪는다. 이츠하크 사데, 이갈 알론, 이스라엘 갈릴리를 비롯한 팔마하 출신 이스라엘군 지도자들은 벤-구리온과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1948년 11월 벤-구리온이 이갈 알론에게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하도록 지시한 때부터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49년 10월 벤-구리온은 모세 다얀을 소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정계에 투신한 이갈 알론을 대신한 조치였다. 대부분의 팔마하 출신 장성들이 정계에 투신하면서 그 공백을 메울 사람이 필요했고, 모세 다얀 이상의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세 다얀은 사막을 사랑했다. 그는 종종 정보장교인 르하밤 지비(Rehavam Zeevi)를 붙잡고 사막으로 함께 나갔다. 때로는 이 두 사람이 수일씩 사라질 때도 있었다. 딸을 데리고 사막을 돌아다니며 성경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렇게 돌아다니다 이집트군 지휘관으로부터 "당신은 지금 경계선을 넘었습니다"라고 경고받은 일까지 있었다. 그때 다얀은 자신의 지도를 내보이며 "내 지도에 의하면 경계선을 넘은 것은 당신"이라고 반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가엘 야딘 참모총장은 남부전선 사령관이 적의 포로가 될 뻔했다는데 경악했고, 그런 모험을 당장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참모총장으로

1953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다얀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참모총장실의 외양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참모총장이 일반 장교들과 유리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했다. 참모총장실을 방문하는 장교들은 마치 화장실에 앉아있는 것처럼, 또는 그저 동료 장교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처럼 편안함을 느껴야 했다. 커다란 책상들과 고급 집기들은 모두 이스라엘군의 일반적인 사무실에서 쓰이는 소박한 것으로 바뀌었다. 에어컨도 없앴다. 참모총장만 허리를 조인 것이 아니었다. 장교들의 복지들도 감소되었다. 장교들의 외국유학도 줄였고, 세탁소, 제과점 등의 복지시설도 없앴다. 목표는 명확했다. 돈이 있으면 무기를 산다! 군의 목표는 야전에서의 승리다. 따라서 모든 정책은 야전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한다. 다얀은 수시로 야전부대를 방문했고, 말단 사병들과도 친구처럼 대화했다. 야전에서 설탕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얀은 사령부로 돌아가 자기 집을 비롯한 모든 집에 설탕 세 부대씩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설탕들은 다음날까지 야전부대로 전달되어졌다.

최전방지역 순시도 계속되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만류하는 참모들에게는 "이스라엘군이 가는 어떤 곳이라도 참모총장은 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행동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전투시 반드시 장교가 앞장을 서서 "나를 따르라(Follow Me)"고 외치는 것은 독립전쟁시부터 이스라엘군의 확고한 전통이었다. 전투의 성공은 장교가 뒤에서 밀어붙임으로써(Pushing)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끌어 감으로써(Leading) 이루어진다. 따라서 장교가 외쳐야 할 말은 "앞으로(Forward)"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Follow Me)"이다. 이런 경향 때문에 이스라엘군 장교 사망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시나이 전쟁의 경우 전사자의 절반 이상이 장교들이었다. 만약 장교가 전략적 필요보다 자신의 안전을 앞세운다면 그는 바로 제대해야했다.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다. 바로 이것이 모세 다얀의 신념이었다.

그의 부관이었던 바르-노르는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당신이 전사(Fighter)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다얀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당신이 장군처럼 보이면서 뒷자리에 앉아 부하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려 한다면, 다얀은 당신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스라엘군 공수부대 지휘관들, 뒷줄 왼쪽부터 뛰어난 요원으로 평가받았던 메이어 하르-지온, 아리엘 샤론, 모세 다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라파엘 에이탄)

강군을 향한 다얀의 의지는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창설한 101부대에 대한 조치로 드러난다. 특수부대의 존재는 이스라엘군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1954년 1월 101부대는 공수부대로 편입되었고, 1956년에는 공수부대가 여단규모로 확대되었다. 뒤이은 다얀의 조치는 그의 목표를 명확히 드러냈다. 특수부대를 없애는 대신 전 이스라엘군을 특수부대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모든 이스라엘군 장교들은 공수훈련을 받도록 명령받았다. 참모총장 자신도 공수훈련을 마친 후 아리엘 샤론으로부터 공수기장을 받았고, 군종감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2년 7월 23일 이집트 자유장교단을 이끈 나세르 대령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1955년 나세르는 이집트군의 강화를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와 경제협정을 맺었고, 이집트가 체코에 면화와 쌀을 수출하는 대신, 체코는 이집트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했다. 명목상은 체코로부터 수입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동지역에서의 패권확보를 노리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이로서 이집트군은 200대의 미그 15기와 50대의 일루신 미사일, 300대의 소련제 탱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이틀 안에 박살낼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무기였다. 이집트군이 이 무기들에 대한 적응을 마치는 1956년 여름부터는 언제든지 전쟁이 가능해졌다.

이스라엘도 무기가 필요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판매를 거부했다. 1954년 7월을 전후하여 이집트 내에서 파괴활동을 벌이던 이스라엘 스파이조직이 적발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어다. 두 명이 자살하고, 두 명이 처형된 이 사건(보통 이 사건 당시의 이스라엘 국방장관 이름을 따서 Lavon 사건이라 부른다)은,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는 잠시 총리자리를 떠나있던 벤-구리온이 복귀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고립을 초래했다. 무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이집트가 알제리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까닭에 이집트는 프랑스와 이스라엘 공동의 적이었고, 양국 모두 좌익정당이 집권하고 있어서 관계도 좋았다. 당시 프랑스와 접촉하여 무기구매를 담당한 사람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였지만, 다얀도 이 작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무기도입협상을 위해 프랑스를 오가는 비행기에서 다얀 참모총장은 우연히 라헬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이혼녀를 만나게 된다.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던 다얀은 비행기 내에서 요세푸스의 책을 읽고 있었다. 다얀은 라헬에게 책의 내용을 열심히 설명했고, 비행기가 이스라엘에 도착할 때쯤에는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라헬과의 관계는 1965년 대중 앞에 드러나게 되었고, 1973년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시나이 전쟁

1956년 7월 26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선박의 운하 통과를 금지했다. 나세르는 이를 아스완댐 건설로 인한 재정확보를 위한 조치라고 변명했으나,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적대감 표명은 날로 극단적이 되어갔다. 이제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집트의 조치에 영국과 프랑스도 격분하고 있었으나 두 나라의 참전여부는 불투명했다. 다얀은 작전목표를 정했다. 이집트군을 타격하되, 주목표는 살상이 아니라 이집트군의 완전붕괴였다. 모세 다얀은 승리를 확신했고, 벤-구리온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영국군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2일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의 수뇌들이 비밀회담을 가졌다. 이 날 제시된 영국 측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이스라엘군이 선제공격을 실시하여 48시간 안에 수에즈운하를 장악한다. 그 시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향해 수에즈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이와 동시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운하에서 철수한다. 만약 이집트가 최후통첩의 요구사항을 거절할 경우,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영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스라엘만이 침공자로 낙인찍히고, 이집트군이 보복해올 경우 이스라엘만 손해를 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모세 다얀은 벤-구리온을 찾아가 새로운 계획을 제시한다. 수에즈 운하 부근에 있는 밀타 수로(Milta Pass)에 이스라엘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이집트군 지도부의 판단을 흐린 다음, 이스라엘군 주력은 3개 방향에서 일제히 시나이반도를 침공한다는 계획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이 계획의 성공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공격을 그 동안 산발적으로 있어온 소규모 보복작전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대처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밀타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이스라엘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10월 29일 오후. 네 대의 이스라엘군 무스탕 전투기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시나이 반도로부터 이집트로 향하는 모든 전화선을 절단한다. 땅으로부터 불과 수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저공비행 끝에 전투기의 프로펠러와 날개만으로 해낸 묘기였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공수부대가 밀타 수로를 향해 출발한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오후 5시 라파엘 에이탄(Rafael Eitan) 준장에 의해 지휘되는 395명의 공수부대원이 밀타수로로 낙하하고,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대령이 지휘하는 일군의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에 대한 보급선을 뚫기 위해 시나이 반도를 넘어 전진한다. 이들이 밀타 수로에 이르는 길에는 3개의 이집트군 거점이 있었으나, 샤론의 공수부대는 이를 간단히 제압한다. 이와 동시에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스라엘군에게 길을 터 주기 위해 약 15킬로미터 후퇴한다. 10월 30일 영국군이 정한 최후통첩에 이집트가 불응하자, 다음날부터 영불 연합군의 이집트 포격이 개시된다. 38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샤론의 부대가 밀타 수로를 점령한 것이 10월 31일. 6일만에 지중해 연안을 석권한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를 횡단하여 홍해와 아카바 만을 향해 진격한다. 같은 날 영국군과 프랑스군 공수부대는 수에즈운하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11월 3일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해방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가자 지구를 점령한다. 11월 5일 이스라엘군이 홍해연안의 샴 엘-샤이크(Sharm el-Sheikh)를 점령함으로써 시나이반도는 완전히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진다. 시나이 전쟁으로 이집트군은 전체 군사력의 1/4을 잃었다. 두 개의 보병사단과 한 개의 기갑여단 그리고 다수의 독립 기갑중대들이 붕괴했고 3,000명이 전사했으며, 7,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00대의 전차, 200문의 대포, 수천 정의 소화기들, 그리고 이스라엘이 최소한 1년간은 쓰고 남을 연료가 노획되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의 피해는 전사자 180명, 부상자 700명이었다.

이 전쟁기간중 모세 다얀은 참모본부를 비워 둔 채 현장으로 나가 작전에 참여한다. 작전참모부장인 가비쉬(Gavish)가 다얀을 찾아 헤맸으나 무려 5일 동안 다얀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 다얀은 스스로 참모총장부대라 명명한 지휘차량에 탑승한 채 늘 최전선 대대 바로 뒤에서 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서인 에제르 바이츠만 공군사령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직도 적의 미그기가 날아다니고 있는 밀타 수로로 직접 날아가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다얀의 운전병이 이집트군 저격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난다.

11월 7일 유엔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구를 포기하고 독립전쟁 당시의 국경선으로 즉각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즉각 점령지구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한다. 11월 14일 이스라엘 의회는 시나이반도에서의 철군에 동의하고, 1957년 1월 22일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에서 완전 철수한다. 비록 땅을 얻은 것은 없었지만,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독립 당시의 나약한 나라가 아님을 입증한다.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나라들은 이스라엘군의 신속한 작전능력에 경악하고 있었고, 최소한 몇 년간은 더 이상 이스라엘 국경을 넘보지 못할 것이었다.

퇴역과 대학생활

1958년 1월 28일 모세 다얀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난다. 평소 나이든 장군들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옛날 무용담이나 늘어놓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다얀은 나이 먹어서까지 군에 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다음 달로 히브리 대학에 등록한 다얀은 딸 야엘 다얀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대학생활 2년을 즐긴다. 교수들이나 학생들 모두 그를 존경했으나, 어차피 공부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다얀이었다. 시험 때는 늘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가며 답을 썼다. 나중에는 그가 제대로 커닝을 했는지 확신하지 못한 교수 스스로가 시험 도중 그에게 넌지시 답안지를 넘겨주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2년간의 대학생활은 다음 선거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일종의 휴식기였다.

대학생활 중에는 어릴 적 친구인 도브 예르미야의 처인 하다사(Hadassah)를 우연히 교정에서 만나 관계를 맺기도 한다. 간통을 한 것이다. 오랜 우정에는 금이 갔고, 도브는 다얀의 처 루스와 벤-구리온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이에 대한 벤-구리온의 답장은 "공인이라면 사생활 문제로 공적생활에 해를 입을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벤-구리온은 다윗 왕의 예를 들어 "절제심 있는 성인군자는 정치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 반대 명제도 진실"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인다. 이후 배꼽 아래의 일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정계의 변함없는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정확히 5년 후 하다사는 이때의 경험을 소설로 출판했고, 이 소설은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의 성공은 모세 다얀의 정치경력에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대중은 가십을 원했고, 낮에는 나폴레옹이고, 밤에는 돈 주앙인 이 사나이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그는 당장 다윗 왕에 비견되어졌다. 별로 잘생긴 얼굴을 아니었어도 다얀과 잠을 자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었고, 그의 여성편력은 평생동안 지속되었다. 훗날 모세 다얀이 동침한 여자들 숫자가 수백 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지만, 이스라엘 언론은 그의 행태에 대해 침묵했다. 1960년대 말 다얀이 윤리와 예의범절에 대해 연설할 기회가 생겼다. 다얀의 연설 도중 청중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쳤다. "한 여자와 결혼하고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윤리에 대해 설교할 수 있소?" 소리지른 사람을 찾는 다얀의 눈이 한 남자 앞에 멈춰섰다. 다얀이 되물었다. "당신 결혼했소?" 남자가 대답했다. "그렇소." 다얀이 다시 물었다. "만약 기가 막히는 미녀가 당신한테 와서 '나하고 한 번 해 줘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질문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생각에 나는 할 것 같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다얀이 소리쳤다. "그게 바로 진짜 남자요!" 그것이 모세 다얀의 태도였다. 모세 다얀은 1971년 그의 첫 부인 루스와 이혼했고, 1973년 라헬과 재혼했다.

국회의원 다얀

1959년 11월 3일의 선거는 벤-구리온의 정치적 승리였다. 노동자당(마파이)은 38.2 퍼센트의 득표율로 의회 120석 중 47석을 석권한다. 베긴의 헤루트 당은 19.4퍼센트의 득표율로 17석을 얻는데 그쳤다. 이스라엘 선거제도는 직선이 아니라 정당 명부제 식이다. 노동자당의 후보자 명부에는 44세의 모세 다얀과, 36세의 시몬 페레스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정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이다. 덕분에 모세 다얀의 아버지 쉬무엘은 처음으로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다. 골다 메이어를 비롯한 노동자당 원로들이 세대교체에 격렬히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벤-구리온은 모세 다얀을 농업장관에 임명했고, 모세 다얀은 이후 5년간 이 자리를 지켰다.

1963년 레비 에쉬콜이 벤-구리온에 이어 이스라엘총리가 되었다. 다얀은 국가안보를 담당할 자리를 원했다. 그러나, 에쉬콜은 이 젊은 영웅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주기를 원치 않았다. 국방장관은 에쉬콜이 겸임했다. 에쉬콜은 다얀이 지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같은 내각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이갈 알론은 훗날 "만약 다얀이 어떤 문제에 대해 주저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그가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에쉬콜이 심사숙고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그가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중에 1965년, 10년 전의 이집트 스파이단 사건(이른바 Lavon 사건)이 다시 불거져 나온다. 에쉬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벤-구리온이 이 문제를 재론하고 나온 것이다. 당시 누가 이집트의 이스라엘 스파이조직에 행동을 명했느냐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던 사건이었다. 에쉬콜은 이를 무시하려 했고, 노동자당의 다수는 에쉬콜의 노선을 따랐다. 이에 반발한 벤-구리온은 당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당을 만드는데 이것이 라피(Rafi, 이스라엘 노동자들과 무소속의 당이라는 뜻)당이다. 모세 다얀과 시몬 페레스는 벤-구리온을 따라 라피당에 합류한다.

11월 2일의 선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난투극이었다. 벤-구리온은 필승을 장담했으나 결과는 라피당의 완패였다. 에쉬콜의 노동자당은 36.7퍼센트의 득표로 45석을 얻었고, 베긴의 가할(Gahal, 헤루트 당과 자유당의 합당)은 21.3퍼센트로 26석을 얻었다. 라피 당은 국가종교당에 이어 7.9퍼센트로 10석을 얻는데 그쳤다. 벤-구리온의 정치적 모험은 완전히 실패했다. 벤-구리온은 자신의 의석을 내놓고 마지막으로 은퇴했고, 라피당은 다얀과 페레스의 손에 맡겨졌다. 정치에 깊이 실망한 다얀은 1966년 여름 월남에 나타난다. 새로운 모험을 찾아서였다. 월남전 현장에서 그는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오히려 취재의 대상이 된 것은 그 자신이었다. 월남전 참관을 마친 그에게 미국정부는 조언을 요청한다. 다얀은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다얀이 이스라엘에 돌아왔을 때, 중동지역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국경선을 침범해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공군력과 특수부대 침투로 철저히 보복했다.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요새화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집트는 아랍 여러 나라들의 맹주로서 이웃나라와의 결속을 다지며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나세르는 1956년의 치욕을 설욕할 기회를 찾는 중이었다. 국지전은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아랍연합군은 54만 7천의 병력과 5,404대의 탱크로 이스라엘군의 30만 병력(정규군은 7만. 나머지는 예비군)과 탱크 800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전투기 수는 아랍진영이 900대, 이스라엘군은 200대에 불과했다. 인구 270만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 국민들의 수는 1억 1천만 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아랍진영에서 나온 기록영화 필름을 보면, 아랍군의 모습은 너무나 늠름하다. 뱀을 잡아서 껍데기를 벗겨 그 자리에서 불에 구워먹고 있는 시리아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이나, 다리를 힘차게 들면서 달려가는 이집트 병사들의 모습은 단정치 못한 이스라엘군의 모습에 비해 훨씬 신뢰가 간다. 그러나, 전쟁은 폼으로 하는 게 아니다.

1967년 5월 12일부터 이집트군은 모든 전쟁준비를 마치고 공격명령만을 기다리는 상태로 들어갔다. 다얀은 남부전선 사령관으로라도 참전하기를 원했다. 옛날의 부하인 라빈 참모총장이 다얀에게 "저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다얀은 주저 없이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전쟁을 앞두고 국민들은 대연정을 희망했다. "모세 다얀을 국방장관으로!"라고 외치는 국민들의 외침도 거세져갔다. 처음에 주저하던 에쉬콜도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는 없었다. 시몬 페레스는 벤-구리온을 설득했다. 마침내 6월 1일 라피당의 모세 다얀이 국방장관으로, 가할의 메나헴 베긴이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하는 대연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6월 3일 안식일에 이스라엘군은 휴식을 명령받는다. 가족들이 병영을 방문했고, 장병들은 영화를 보러 놀러나갔다. 휴가중인 이스라엘군 장병들이 해변을 거니는 사진이 신문을 도배했다. 이는 아랍 여러 나라들의 판단을 흐리기 위한 완전한 사기극이었다. 모세 다얀과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지도부는 누구보다도 바쁜 안식일을 보낸다.

6일 전쟁

6월 5일 월요일 오전 7시 45분. 이스라엘 공군은 6개의 이집트 공군기지를 기습한다. 제1진으로 103대의 이스라엘 공군기가 197대의 이집트 공군기를 파괴했다. 잠시 후에는 제2진으로 164대의 이스라엘 공군기가 공격에 나서 14개 이집트 공군기지에서 모두 107대의 이집트 공군기를 파괴했다. 두 시간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75퍼센트가 공중에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한 채 소멸되었다. 아직 이집트군 조종사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터진 일이었다. 오전 8시 15분. 이스라엘군이 전면공격을 개시하고, 이와 동시에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군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이스라엘 공군은 요르단 공군기 28대와 시리아 공군기 53대를 파괴하는데, 이는 요르단 공군력의 100퍼센트이자 시리아 공군력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같은 날 이스라엘 공수부대는 헬리콥터를 타고 시나이 반도로 진격한다.

6월 6일 이스라엘군 특공대가 예루살렘 구시가로 들어가는 사자문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7일에는 모르데카이 구르(Mordechai Gur) 대령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구시가를 점령한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날 전투복을 입은 채 성 스테반 문을 지나 구시가로 들어가는 다얀과 라빈, 그리고 예루살렘군 사령관 나르키스의 사진은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8일에는 가자 지구를 비롯한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오고, 10일에는 골라니 여단이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너무나 빠른 승리였다. 미처 이스라엘 깃발을 준비하지 못한 이스라엘군은 헤브론에 진입하면서, 하얀 천에 진흙을 발라 다윗의 별 모양을 만들어 헤브론에 내건다.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이루기 이전, 다윗 왕이 거점으로 사용했던 헤브론의 회복 역시 이스라엘에게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6월 10일 오후 6시 30분. 개전한지 불과 6일만에 전쟁은 끝이 났다. 이미 시나이반도, 골란 고원을 빼앗은 이스라엘의 땅은 전쟁 전에 비해 세 배가 늘어난 상태였다. 전쟁기간중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679명, 이집트군 사망자가 약 15,000명, 요르단군 사망자가 약 1,000명, 시리아군 사망자가 약 2,500명이었다.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다.

6일 전쟁의 승리와 함께 모세 다얀의 얼굴은 전세계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그의 전기가 앞을 다투어 출간되었다. 왼쪽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그의 얼굴은 곧 6일 전쟁을 상징했다. 그러나, 6일 전쟁에서 모세 다얀이 실제 한 일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는 전쟁발발 불과 4일 전에 국방장관에 임명되었고, 그의 임명 이전에 이스라엘군은 이미 전쟁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따라서 6일 전쟁의 최대 공로자는 다얀이 아니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이라는 평이 많다. 그것은 사실이다. 라빈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전쟁을 기획해 왔다. 하지만, 라빈이 준비해놓은 전쟁의 스위치를 올리고, 이 전쟁에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은 모세 다얀이었다.

6일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에 새로운 위기를 가져왔다. 엄청나게 넓어진 땅을 관리하고 방어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 문제는 이후 30여 년 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는 무려 100만 명에 달하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세계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사드(Massad,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주로 해외업무를 책임진다)나 신 베트(Shin Bet, 주로 국내 정보를 담당한다)의 임무에도 변화가 왔다. 이제는 점령지구 내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벌여야 하게 된 것이다. 정보기관도 점차 게릴라를 색출하기 위한 게쉬타포(나치 비밀경찰)처럼 변질되게 되었다. 점령지구를 반환하라는 전세계의 요구와도 싸워야 했다. 승리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대가였다. 그런 반면에 이 점령지구의 존재로 인해 훗날 중동평화회담에서 이스라엘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 이점도 있었다.

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고 방어하는 역할은 모세 다얀의 몫이었다. 언론은 모세 다얀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된다고 보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인기를 누를 사람이 없었다. 1968년 1월 분열되었던 노동자당과 라피당이 다시 뭉쳐 노동당(Labor Party)을 결성했다. 모세 다얀도 노동당 소속이 되었다. 1968년 3월 18일에는 네게브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스쿨버스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버스테러 사건 다음날 다얀은 평소의 취미인 고고학 발굴에 나섰다가 굴의 천장이 그의 머리 위로 무너지면서 갈비대가 두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인 파타(Fatah, 야세르 아라파트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즉각 자신들의 공격에 의해 다얀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부상이 완치되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의미에서 다얀의 여성편력과 관계된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1968년말 다얀은 텔 아비브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엘리세바(Elisheva)라는 미모의 22세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먼저 접근한 것은 엘리세바였다. 이 여자는 다짜고짜 국방부로 전화를 걸어 다얀을 연결해 달라고 한다. 모세 다얀이 전화를 받자 그녀는 전화를 통해 자기 친척의 수표위조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메이어 샤미갈 검사와의 사이에 중재를 서 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일면식도 없었다. 샤미갈 검사와 다얀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다얀은 이 황당한 전화에 대해 무조건 전화를 끊는 대신 그녀에게 "좀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을 한다. 엘리세바가 "이 세상의 많은 여자 중 왜 하필 나를 만나려고 해요?"라고 묻자, 다얀은 "목소리가 예뻐서"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텔 아비브의 한 칵테일 파티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다얀은 "아가씨 아직 처녀요?"라고 묻는다. 엘리세바는 "예. 나는 내가 결혼할 남자하고만 잘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좀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다얀은 "그렇다면 내가 비밀 하나를 말해 줄 것이 있어요.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소."라고 말한다. "당신은 결혼한 남자잖아요?"라는 엘리세바의 질문에 다얀은 "나는 현재 루스에게 이혼을 요청중이요"라고 답변한다. 당시 다얀이 루스와 거의 이혼 직전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라헬과 여전히 사귀고 있는 중이기도 했었다. 그 날로 두 명은 같이 잔다. 1970년 엘리세바는 다얀을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한다. 양측 변호사의 협상 끝에 다얀은 엘리세바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조건으로 10,000파운드를 주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1972년 1월 23일, 독일의 슈테른지는 엘리세바의 정보제공을 기초로 무려 10페이지에 이르는 기사를 게재한다. 수년 후 라헬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그는 모든 사실을 부인했어야 해요. 돈을 주고 또 주고, 그리고 결국 그 여자는 이 이야기를 잡지들에 팔아먹었어요. 사진까지 함께 말이지요." 전처 루스는 이런 다얀에 대해 "왼쪽눈을 잃는 부상을 입을 때 뇌까지 같이 다쳐 섹스광이 된 모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1969년 에쉬콜 총리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계자로는 모세 다얀 국방장관과 이갈 알론 부총리 겸 이민장관이 유력시되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다얀은 알론을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주류세력은 다얀이나 알론이 총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얀과 알론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밑으로 들어가거나, 상대방과 함께 일하기를 원치 않았다. 결국 총리자리는 노동당 주류세력의 지지를 받은 골다 메이어(Golda Meir)에게 돌아갔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에쉬콜 내각의 기본 골격을 유지했고, 다얀은 국방장관에 유임되었다. 평소 모세 다얀을 너무나 싫어하던 골다 메이어였지만 안보 문제에 관한 한 다얀 이상의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고, 국민도 다얀을 원했다.

욤 키푸르 전쟁

그러나,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자신감은 지나친 것이었다. 모세 다얀은 인근 아랍국들이 감히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리라는 신화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신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1973년 이 환상은 깨어졌다. 그 해 9월부터 시리아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국경선에 3개 사단과 670대의 탱크를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통상적인 훈련의 일환으로만 판단했다. 이스라엘군의 북부지역 사령관인 이츠하크 호피 소장(욤 키푸르 전쟁 후 이스라엘 군사정보부장)은 증원군을 요청했고, 100대의 탱크가 증강되었지만, 시리아군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감히 우리를 공격하랴"는 착각을 버리지 못했다. 르하밤 지비를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전쟁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다얀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스라엘군 내부도 전쟁발발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한번 동원령을 내릴 때마다 최소한 1,000만 불이 소요되었다. 이미 두 차례나 동원령이 내려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이것은 전쟁을 앞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트릭이었다. 함부로 세 번째 동원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정보기관들은 특별히 걱정할 일이 없다고 보고했다. 10월 5일 금요일 저녁부터 유태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인 욤 키푸르(대속죄일)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모든 나라가 문자 그대로 문을 닫는 날이 이 날이었다. 최소한의 국가기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휴식에 들어갔다. 다음 날인 10월 6일 새벽 모사드의 즈비 자미르(Zvi Zamir) 부장은 전쟁 발발여부를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떠나 제3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 날 오후 6시에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이보다 4시간 앞서 시작되었다. 총체적인 오류의 연속이었다.

오후 2시. 이가엘 야딘은 다얀으로부터 전직 참모총장들을 소환하는 전화를 받고 텔 아비브로 향하던 중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에 접하게 된다. 2시 30분. 방송은 "방금 전의 사이렌은 훈련이 아님"을 알린다. 3시 30분. 전국민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동원령이 내려진다.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오후 2시에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기습당한 초전에 이스라엘은 큰 피해를 입는다. 수에즈를 방어하던 단 숌론(Dan Shomron) 기갑여단장은 100대의 탱크 중 75대를 잃는다. 시리아 전선에서는 총 1,400대의 탱크가 이스라엘을 향해 물밀 듯이 전진해 들어온다. 이 중 600대는 국경선의 라피드에 집결했는데, 라피드를 방어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전력은 불과 탱크 57대였다. 시리아군은 순식간에 골란 고원의 절반을 장악한다. 동원령을 받고 라피드에 도착한 즈비카 그린골드(Zwicka Gringold) 중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동료들의 시체와 부서진 탱크 뿐이었다. 즈비카 중위는 유럽출신의 빨치산과 게토에서의 투사들이 주류를 이룬 서부 갈릴리의 로하마이 하게타오트(Lohamei Hagetaot) 키부츠 출신이었다. 동료들의 시체를 끌어낸 그는 남겨진 4대의 탱크로 방어작전을 시작한다. 골란 고원 북부의 형편도 똑같았다. 히말라야로 떠났던 신혼여행에서 천신만고 끝에 복귀한 요시 벤-하난(Yossi Ben-Hanan) 중령은 로드 공항에서 내리는 즉시, 전선으로 달려가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13대의 탱크를 모아 시리아군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전쟁 첫날 적에게 대항하는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대체로 이런 수준이었다. 벤-하난 중령이 소속된 바락 기갑여단은 이미 장교의 90퍼센트가 전사 또는 부상당한 상태였다. 전쟁 발발 직후의 100시간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정부도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고, 증원군도 없는 형편에서 이스라엘군은 첫 100시간을 거의 순전히 정신력으로만 버텼다. 그리고, 이 100시간이 이스라엘을 구했다. 시리아군의 성공은 처음 100시간이 전부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100시간이 지난 뒤부터는 서서히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장비나 인원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방공호에 숨어있는 시민들은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라디오 뿐이었다. 골란 고원에서는 주민들의 소개령이 내려졌다. 다얀은 방송을 통해 전황을 알렸다. "이집트 전선에서는 다수의 아군이 전사했으나 아직까지 심각하지 않다. 시나이반도에서도 고전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그곳은 넓고 넓은 사막이다. 골란 고원에서 우리도 피해를 입었지만, 시리아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를 골란 고원에서 쫓아내려는 시리아군의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더 많은 이집트군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우리는 진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 전쟁은 단지 그들을 멈추게 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20만 명 이상의 예비군이 소집되었고, 그들은 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85만 명의 이집트군과 30만 명의 시리아군이었다.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10월 10일에 이미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을 최초의 시리아국경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군은 1,100대의 최신 소련제 탱크와 3,500명의 병력을 잃었다. 10월 11일 8대의 탱크로 공격군을 지휘하던 요시 벤-하난 중령은 숨겨져 있던 시리아군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적진에 남겨진다. 그는 이미 두 차례나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스라엘군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마지막 시도로 특수부대가 야음을 틈타 적진에 침투하여 드라마틱한 구출작전 끝에 벤-하난 중령을 구출하는데, 당시 이 작전을 지휘한 것이 요나단 네탄야후(Jonathan Netanyayu) 대위였다.

이라크와 요르단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헬몬산도 이스라엘군의 희생을 무릅쓴 끈질긴 공격 끝에 10월 22일에는 이스라엘의 수중에 돌아왔다. 같은 날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국경 안의 수에즈 마을로 진격했다. 이스라엘군이 최초로 아프리카 본토에 진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 제3군은 괴멸했다. 1,000대의 탱크를 잃었고, 8,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 포로들은 후에 240명의 이스라엘군 포로들과 교환된다. 16일간 계속된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아리엘 샤론은 욤 키푸르 전의 경험으로 자신의 회고록을 시작하고 있다. 개전 이후 14일 동안 한잠도 못 잔 샤론 소장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모래바닥 위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든다. 꿈결처럼 부하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하자. 아릭(샤론의 별명)이 피곤한 모양이다. 자게 놓아두자" 누군가 담요를 가져다 덮어준다. 샤론은 그 소리를 들으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따뜻함을 느낀다. 25년 전 독립전쟁에 참전했을 때 이라크 전선 후방을 공격하던 시절에도 그는 비가 새는 텐트 아래서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페레츠 상사가 똑같은 소리를 하며 이불을 덮어주는 소리를 들었었다. 이스라엘군은 그에게 있어 가족과 같았다. 장군이고 뭐고 간에 사병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특권층은 없었다. 비록 10년 후에는 레바논 전을 시작하여 국제적 지탄을 받는 샤론이지만,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얀의 몰락

결과는 승리였다 해도, 욤 키푸르 전쟁이 이스라엘에 미친 손실은 엄청났다. 총 2,522명의 이스라엘군이 전사했다. 병력손실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것은 국론의 분열이었다. 전쟁을 조기에 예측하지 못한 것과 전쟁 첫날 이스라엘 내각이 보여준 갈팡지팡하는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논쟁이 가열되었다. 모세 다얀을 비롯한 6일 전쟁의 영웅들이 이제는 줄줄이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청문회에 불려 다니는 동안, 주변에서는 그의 사임을 권유했다. 이스라엘 최고의 인기인이던 그가 이제는 길거리에서 전사장병의 유족들로부터 "살인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랍국들이 감히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리라던 그의 자신감이 이제는 비수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모세 다얀은 "만약 총리가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만약 총리가 원한다면 국회의원 후보 명단에서도 빠지겠다"는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당연히 총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연기되었던 총선이 12월 31일 실시되었고, 노동당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다. 골다 메이어는 총리로 유임되었으나 내각구성이 쉽지 않았다. 1974년 3월 구성된 내각은 4월 1일 대법원장 아그라나트가 이끄는 위원회가 겨우 40장에 불과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곧바로 붕괴의 위기를 맞는다. 위원회의 요구에 의해 모사드 부장과 군사정보부장을 포함한 네 명의 정보부 수뇌와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David Elazar)가 퇴진한다. 위원회의 보고서는 골다 메이어나 모세 다얀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그들의 책임은 명백했다. 퇴진하는 엘라자르 참모총장도 모세 다얀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4월 11일 골다 메이어가 퇴진했다. 총리직은 이츠하크 라빈에게 넘어간다. 시몬 페레스가 다얀을 이어 국방장관에 취임한다. 국방장관에서 퇴진한 이후에도 다얀의 삶은 쉽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분노한 군중들이 그를 손가락질했다. 다얀의 시대는 완전히 끝나는 걸로 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딸 야엘과 함께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 뿐이었다.

중동평화의 길

그러나, 다얀은 정계 은퇴를 거부했다. 그는 여전히 국회의원이었고,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엔테베 인질사건 등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는 시몬 페레스의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977년의 선거는 모세 다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리쿠드 당의 메나헴 베긴이 집권한 것이다. 사실 몸은 늘 노동당 진영에 있었지만, 다얀의 정치적 색채는 리쿠드 당에 가까웠다. 힘에 의한 거대 이스라엘 건설이라는 그의 목표가 리쿠드 당과 같았던 것이다. 노동당 간부로는 드물게 베긴 진영과도 사이가 좋았다. 베긴은 다얀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중동평화회담을 앞둔 베긴의 이러한 선택은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다얀만큼 군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화회담의 최대난제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는 모두 다얀이 빼앗은 땅들이었다. 역설적으로 평화협상에 나서는데 그만큼 적당한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중동평화회담은 다얀을 다시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그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처음에 베긴은 이집트와 요르단을 평화회담 파트너로 택했고, 베긴과 다얀은 전세계를 날아다니며 중동평화의 길을 모색한다. 1977년 8월 다얀은 인도와의 국교수립을 위해 인도로 갔고, 돌아오는 중에는 극비리에 영국에 들러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을 만난다. 비밀유지를 위해 때로는 검은 안대도 벗어 던졌다. 그러나, 후세인 국왕이 다얀의 제안을 거부한 후 주된 파트너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으로 한정된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재를 선 끝에 모로코에서 다얀은 이집트 부총리인 투하미와 자리를 마주한다. 유엔총회에 참석했다가 미국의 사이런스 밴스 국무장관과 카터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다얀의 일정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에 서로의 진의를 탐색하는 지루한 게임이 계속된다. 1977년 11월 9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국회연설을 통해 이스라엘을 방문할 의사가 있음을 처음 표명한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겠다는 사다트의 용기에 대해 이스라엘은 11월 15일 사다트를 공식 초청하는 것으로 화답하고, 11월 17일 사다트가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11월 19일 사다트가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한다. 12월 25일 베긴이 이집트를 방문하고, 1978년 9월 17일에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조인된다. 이 협정은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군 완전 철수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은 네게브 사막에 이스라엘을 위한 두 개의 공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평화협상의 길에서 베긴과 다얀의 의견이 같을 수는 없었다. 가자 지구나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다얀과 베긴의 대립은 심화되어갔다. 협상과정에서 다얀은 점차 배제되었다. 1979년 여름부터 다얀은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건강도 악화되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1일 다얀은 외무장관직을 사임한다.

1981년 다얀은 독자적으로 텔렘당(국가개혁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참여하지만, 겨우 2개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친다. 사람들은 그의 당을 다얀 당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남아있는 한쪽 눈도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누가 봐도 그는 환자로 보였다. 입원한 상태에서 그는 자기가 쓰고 싶은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한나 세네스, 메이어 하르-지온, 요나단 네탄야후 같은 이스라엘의 영웅들에 대한 책을 쓰고 싶어했다. 10월 6일 다얀의 오랜 적수였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욤 키푸르 전의 승리를 자축하는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했다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10월 16일 모세 다얀이 세상을 떠난다. 모세 다얀이 떠난 자리에는 그의 자녀들과 후처 라헬 사이의 법정분쟁이 남겨졌다.

사족

모세 다얀의 생애를 살펴보다 보면, 그와 이가엘 야딘의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의 부모는 모두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시오니즘 운동의 개척자 노릇을 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어머니는 모두 적극적이고 용감한 여자들이었다. 색깔은 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군사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고학에 대한 관심도 비슷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프로페셔널로, 다른 한 사람은 아마추어로 고고학 유물발굴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두 사람 모두 동생 하나씩을 독립전쟁에서 잃었다. 두 사람 모두 정치에 참여했고 나중에는 같은 내각에서 일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왼쪽눈이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색맹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군사지도자로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다얀이나, 야딘도 좋은 예이고, 뒤에서 보는 요나단 네탄야후 역시 그렇다. 부상=전역이고, 전역 후 연금이나 받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부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용사들의 전쟁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부상을 입고 군대에 남아있고자 자원한 군인들 이야기도 별로 못 들었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군대가 그걸 받아들여줄지 의문인 나라가 우리 나라이다. 장애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신체 일부의 장애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 오히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군대에 장애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선입견도 잘못된 것이다. 요즘 전쟁은 그저 몸으로만 때우면 되는 구석기시대의 싸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관으로 가려고 공군에 지원한 우수한 인재를 단지 "색맹"이라는 이유로 떨어뜨리는 획일적인 병무행정은 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나는 한 번 묻고 싶다. 애꾸눈, 외팔이, 색맹(이런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함을 용서하시라)이 이끌었던 이스라엘 군대보다 우리 군은 얼마나 강하냐고.

참고서적

Libbie Braverman and Samuel Silber, The Six-Day Warriors, Bloch Publishing Company/ NY, 1969.
Moshe Dayan, Diary of the Sinai Campaign, Sphere Books/London, 1966
Moshe Dayan, Story of My Life, William Morrow and Company/NY, 1976
Shmuel Dayan, Pioneers in Israel, The World Publishing Company/NY, 1961
Yael Dayan, My Father, His Daughter, Farrar Straus Giroux/NY, 1985
Martin Gilbert, Israel (A History), William Morrow and Company/NY, 1998
Samuel M. Katz, Israeli Tank Battles, Yom Kippur to Lebanon, Arms and Armour Press/NY, 1988
Robert Slater, Warrior Stateman (The Life of Moshe Dayan), St. Martin's Press/NY, 1991.
Shabtai Teveth, Moshe Dayan, the Soldier, the Man, the Legend, Weidenfeld and Nicolson/London,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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