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이스라엘의 환경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3개 대륙이 만나는 지점으로써 지정학적으로 국제적인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지형조건에 관해서는 http://blog.naver.com/dkmcdkmc?Redirect=Log&logNo=40038752487 참고.

지리적으로 이곳은 1. 해안지역 2. 유대광야 3. 요르단 강 유역의 세가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해안지역은 고대로 부터 중계무역을 통해서 발전하였고 이 곳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서 날라온 물자를 지중해로 실어나르는 무역이 발전하여 그리스계 이민들의 도시국가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이들이 바로 비블로스를 근거지로 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다.

유대광야 지역은 이스라엘의 중-남부에 펼쳐진 광야지대로 일종의 황무지이며 건기와 우기가 확실하여 와디가 흐르고, 사막은 아니나 일부 유목민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고지대와 우물을 근간으로 행해진다.

요르단강 유역은 헤르몬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흘러드는 요르단 강을 생활의 터전으로 하여 갈릴리 호수를 비롯하여 풍광이 수려하고 자원이 풍족한 지역이다. 북부 이스라엘의 골란 고원 일대도 포함하여 이 지역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다.

역사적으로 볼때는, 각각의 입장에 따라서 주장이 바뀌는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의하여 수없이 주인이 바뀌었으며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그 후계자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로마에 의해서 속주로 편입되었다가 잦은 민란으로 인하여 2세기 경에는 유태인의 거주를 금지시키는 조치까지 받았었다.

일반적으로 유태인들은 이 시기에 완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축출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는 않다. 유태인의 집단적 정치활동과 종교활동이 금지된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도 상당수의 유태인들이 이후로도 이 지역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비잔틴 제국이 이 지역의 통치권을 유지하다가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하였고 그 통치하에서 유태인들은 나름대로의 자치권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국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망국의 백성으로 유럽과 중동 각지에 흩어져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나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기를 거치며 잠시 이 지역의 지배권이 바뀌기도 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스만 제국은 큰 변동없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배권을 소유했고, 이 지역은 일종의 해양민족으로 출발한 팔레스타인 인들이 점차 다수세력을 구성하게 되었다. 약 천오백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외국의 통치하에 있는 다수의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던 이 지역은 유럽에서 이루어지는 유태인 박해 운동의 결과로 발생한 시오니즘의 발생과 함께 미미한 변화의 흐름을 맞이하게 된다.

시오니즘은, 옛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작은 산,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유대 민족주의의 강한 발현이다. 초기에 이러한 운동은 낭만주의적인 형태로 발생하였으나 19세기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 움직임과 결부되어 유태인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서 점차 활동력을 얻게 되었고, 1887년 테오도르 헤르즐에 의하여 시오니스트 대회가 개최됨에 의해 일종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집트를 식민지화 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아랍지역에서 대결하고 있던 영국은 1차대전을 거치며 영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두가지 상반된 선언을 하게 된다. 하나는 시온주의자들의 희망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서 독립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돕겠다는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고, 동시에 아랍인들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독립시키겠다는 약속도 이루어졌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이 시기의 이야기이다. 로렌스는 아랍인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운동을 돕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에 낭만적이고 우호적인 영국군 정보장교로 그려진다.)

1882년 시오니즘 운동에 의한 유대계 이민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서기 시작한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불과 3만 2천여명밖에 유대계 이민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동유럽 각지, 독일의 나찌즘에 의하여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2차대전 이전에 유태인 인구는 7만에서 약 40만까지 증가한다. 이러한 급속한 유대계 인구 증가는 이 지역에서 공존하고 있던 아랍계 다수파를 긴장시키게 되고, 잦은 토지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지역에 대하여 지배권을 구축한 영국인들에 대하여 아랍인들은  1차대전 이후부터 점차 반 영국, 반 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2차대전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2차대전 중 한때 가라앉기도 했던 양 민족의 대립은 대전말기에 이르어 한층 강화되었고, 입지를 강화한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반 영국, 반 아랍 폭동의 주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영국은 양자간의 분쟁조절에 실패하고 결국, 이 지역의 격렬한 민족분쟁의 해결을 1947년 국제연합에 위임하기에 이른다. UN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 지역에서 아랍-이스라엘의 연립형 독립정부 구성안과 아랍-이스라엘이 각자 독립된 정부를 구성하고 예루살렘은 국제연합이 관리하는  두가지의 안건을 내놓았고 민족자결에 입각한 타협안은 미-소 양측에 의하여 지지되었다.

그러나 이 안건을 이스라엘은 찬성한데 반해서 아랍측은 반대하기 시작하였고, 팔레스타인 각지에서는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48년 영국이 이 지역의 위임통치를 끝마침과 동시에 벤구리온을 국가 수반으로 하여 텔 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면, 팔레스타인 세력은 아랍연맹에 가입하고, 이스라엘을 이 지역에서 축축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팔레스타인 세력이 우월했다.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요르단이라는 거대주변국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신생 이스라엘은 탄생과 동시에 사망위험에 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2년여에 걸친 이 1차 중동전(팔레스타인 전쟁)은 놀랍게도 중동제국에게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결말이 맺어졌다. 당시 아랍군은 수적-장비 면에서 우세에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우월한 전략과 헌신적 감투정신에 힘입어 중동 각국과 개별적으로 휴전을 도출해내었고 이 당시 점령한 지역이 이스라엘 공화국의 근본영토로 지정되었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연맹(팔레스타인을 포함한)의 대결양상은 점차 심해졌고, 적국에 둘러쌓인 형태에서도 이스라엘은 선전을 거듭하여  56년 10월의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67년 6월의 3차 중동전쟁, 73년 10월의 4차 중동전쟁에서 모두 승리하는 이른바, 이스라엘 군 신화를 이룩한다. 이스라엘군은 82년의 레바논 침공작전 (샬롬 파 갈릴리 작전)까지 반세기에 걸쳐서 아랍제국에 번번히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놀라운 투지를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인티파타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