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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2. 전쟁 개괄

전쟁의 전개

남북전쟁 중에 벌어진 1만회가 넘는 교전중 약 40%가 버지니아와 테네시에서 일어난 것은 무대가 되는 미국 동부 지역의 지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남부는 우측은 대서양이, 좌측은 애팔래치아 산맥이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도로망이 발달되지 못한 지역으로 넓이는 러시아의 유럽쪽 영토에 필적할만큼 넓은 지역이다. 대서양과 평행하게 달리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기준으로 동부에서는 160km도 안되는 양쪽 수도 사이에서 치열한 진지전이 벌어진 반면에 서부에서는 광활한 지역에 펼쳐진 강과 계곡이 천연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가운데 뉴올리언즈를 통해서 해군이 접근할 수 있는 미시시피 강이 다시 남부를 가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부에서는 서로가 수도점령을 노리며 버지니아에서 치열한 진지전을 벌이고 서부에서는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놓고 전투가 집중되게 되었다.

전쟁의 시작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링컨이 당선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연방탈퇴를 선언했다. 1861년 2월이 되자 남부 6개주가 추가로 탈퇴를 선언했고 2월 7일, 7개주는 임시 수도를 알라배마의 몽고메리로 하는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분위기는 긴박해지고 있었으나 남은 8개 노예주는 남부에 가담하기를 거부한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군은 각주의 연방 요새들을 점령해 나갔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뷰캐넌은 항의를 표시하기는 했지만 남군에 포위된 섬터 요새에 스타오브웨스트호를 동원해 보급물자를 전달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군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메사츄세스와 뉴욕, 펜실베니아에서는 주지사가 조용히 무기를 구입해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위협 때문에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중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링컨은 헌법질서가 연방선언보다 우선하며 각주의 결합이 영속함을 강조하면서 탈퇴선언은 ‘법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와 함께 링컨은 남부를 침공할 의도나 노예주에서 추가로 노예제를 금지시킬 의도가 없으나 연방 공공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은 무력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좌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남부는 워싱턴에 특사를 파견해 연방재산의 손실분에 대해서 배상하는 대신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지만 링컨은 남부와의 어떠한 협정도 공식적으로 남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조약체결을 거부했다.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가 비밀리에 남부와 협상을 체결하려 했지만 이것도 실패하면서 양측은 전쟁을 향해 치달았다.

자세한 내용은 섬터 요새 전투 참고.

링컨이 취임한 시점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는 연방이 통제하고 있는 섬터요새와 몬로 요새, 피킨스 요새와 테일러 요새가 남아있었고 링컨은 섬터 요새를 사수하도록 지시했다. 4월 12일 P.G.T. 보우리가드가 지휘하는 남군은 섬터 요새에 포격을 가하면서 항복을 권고했다. 북부의 여론은 각주에서 병력을 소집해 요새를 되찾고 연방을 수호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군의 규모에 기초해 링컨은 90일 기한으로 7만5천명의 지원군을 소집했으며 이미 민명대를 소집해둔 주지사들은 급격히 병력을 파견했다. 한편 테네시, 아칸사스, 노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등 남부에서도 북부와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4개주는 다른 남부주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추가로 연방탈퇴를 선언한 뒤 남부에 합류했다. 버지니아가 합류하자 남부는 수도를 리치몬드로 옮기고 섬터 요새를 점령한 8일 후에 리버티 무기고를 점령해 군비를 확충했다. 이후 리치몬드는 남부의 상징이 되었으며 남부 보급선 끝자락에 위치한 이 위태로운 도시는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그랜트가 피터스버그를 점령해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기 까지 고도로 요새화된 수도로 기능했다.

전쟁의 특징

남북전쟁은 그 시대 최대의 전란이었지만 유럽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막대한 동원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적인 전쟁지휘로 뒤죽박죽이 된 전쟁에서 관전하러 온 유럽의 무관들은 미국의 군사기술이 뒤쳐졌기 때문에 전쟁이 이토록 지지부진하다고 생각했지만 남북전쟁이 그토록 소모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군사기술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부는 초반에 기세좋게 공세에 나섰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라이플 총으로 무장한 상황에서는 방어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양측은 모두 철도를 이용해서 육상 보급에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동부에서는 양측 모두 대규모의 병력을 비교적 빠르게 집결시키고 원활한 보급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철도는 수십만의 병력을 수백km후방에 떨어져 있는 보급기지에서 몇년간이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했고 이로써 전쟁의 밀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결국 동부전선의 전투는 지구전 양상에 들어갔고 전쟁은 북부가 해상과 미시시피 강의 해상보급로를 완전히 장악해 해상보급에 이용하고 남부의 기반시설을 파괴해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고사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럽에서는 남북전쟁의 특징들을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실패한 때문이라고 판단했지만 1차대전에 들어서야 이것이 산업화된 전쟁의 예시였음을 알게된다.

1861년 아나콘다 플랜과 해상 봉쇄

개전 당시 북군 총사령관이던 윈필드 스콧 장군은 링컨에게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안으로 아나콘다 작전을 조언했다. 즉, 북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해군을 이용해서 남부의 모든 항구를 봉쇄해 남부를 약화시키는 한편,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확보해서 남부를 양분시킴으로써 대규모 육전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링컨은 해상봉쇄 계획은 받아들였지만 리치몬드에 성급하게 전면공격을 가했을 경우 발생할 문제들에 대한 조언은 거부했다.

결국 1861년 5월에 링컨은 모든 남부 항구를 봉쇄하고 무역활동을 중단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를 위반한 선박은 정선시키고 화물을 압수한 다음 매각해 버리고 외국 선원들은 풀어주는 방식으로 봉쇄가 진행되었다. 봉쇄는 함대가 적 항구 근처에서 계속 위치를 바꾸며 봉쇄돌파선들을 막아서는 형태로 진행되는 지극히 지루한 작전이었지만 비용대 효과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대단히 매력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남부는 영국에서 구입한 홀수가 얕은 소형 고속선들을 이용해서 봉쇄망을 간간히 돌파했지만 1861년 말이 되자 남부의 모든 해상운송은 마비되었고 남부의 경제도 동맥경화 상태에 빠졌다. 숙련된 선원이 부족했던 남부는 영국에 비용을 지불하고 봉쇄돌파선의 운용을 위임하는 방법으로 버뮤다, 쿠바, 바하마 등지의 거점을 통해 무기와 전략물자를 입수하고 목화와 담배를 매각할 수 있었으나 봉쇄를 돌파할 수는 없었다. 장기간의 해상 봉쇄로 식량과 다양한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남군은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1862년 3월 8일, 남부 해군은 철갑선 CSS 버지니아를 이용해 봉쇄중인 북군함대를 공격했다. 실전에 투입된 철갑선은 맹위를 떨쳤으나 바로 그 다음날 북군은 보다 진보된 철갑선 USS 모니터를 투입해 햄튼 수로에서 철갑선 간의 교전을 벌였다. 햄튼 수로의 교전 자체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남군이 결국 봉쇄를 돌파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전략적으로는 북부가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이후 북부가 항구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자 남군은 버지니아가 나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배를 자침시켰다. 북부는 계속해서 모니터 함선을 건조해나갔고 기술력과 산업력에 열세인 남부는 영국에서 선박을 구입하려 했지만 1865년 2차 포트 피셔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남부는 봉쇄를 돌파할 만한 해군이 주둔할 모든 거점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