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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바이킹

바이킹은 8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활약한 스칸디나비아의 모험가, 전사 겸 상인인 해적이다. 이들은 유명한 바이킹쉽을 타고 동으로는 볼가강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나 러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서쪽으로는 아이슬랜드, 그린랜드와 심지어 북미대륙의 뉴펀틀랜드에도 정착지를 건설했다. 바이킹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부르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7세기의 낭만주의적 사조에 따라 바이킹들은 고귀한 전사로 재해석되었으며 특히 영국이 스칸디나비아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각광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독일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민족주의에 의해 바이킹 시대를 부각시켰고 이러한 사회, 정치적 상황이 바이킹의 현대적 재해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언어학적 분석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작은 만’, ‘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에 접미사 -ingr이 붙은 것이라는 해석에 따르면 바이킹이라는 말은 ‘협만의 거주자’라는 뜻으로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한편 고대 노르드어로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vikingr라고 적었으며 많은 룬 비석들에서 발견되는데 아이슬랜드의 모험담(Saga)에서 바이킹은 바다를 넘나드는 모험가들을 지칭한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fara i viking 은 모험하러 간다는 뜻이다.) 또 vikingr는 어부나 전사들이 그러한 모험에 참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영어에서 wicing이라는 말은 9세기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앵글로 색슨어 시 “Widshith”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담 폰 브레멘에 의하면 고대 영어에서 이 단어는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 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적을 의미하는 말로, 단어로 사용되기 보다는 문장에서 사용되었고 특정한 집단을 의미하기 보다는 행동을 의미하는 언어였다. 따라서 “go Viking”이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의 상업이나 교역행위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 단어는 중세 영어에서는 사라졌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Viking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했고 영웅적이니 색채가 깃들여져 있는 야만인 전사를 지칭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바이킹이라는 말의 의미가 보다 확장되어 습격해온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면서 의미상 전사이자 모험가, 상인이며 해적이었던 바이킹과 그 시대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혼용되었고 이와 함께 바이킹 시대, 바이킹 문화, 바이킹 식민지 같은 단어도 사용되었다. 또 원래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스칸디나비아를 의미하던 바이킹이라는 ‘노르드’라는 단어가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하던 문화를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현대 스칸디나비아 언어에서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그 시대에 모험과 상업, 약탈을 하던 사람들을 통칭해서 사용한다.

바랑기안(Varangian)이라는 단어는 이들에게 일정한 직책을 맡겼던 비잔틴 제국에서 처음 등장한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강을 따라 러시아를 가로질러 콘스탄티노플까지 도착했다. 비잔틴에서 바랑기안이 처음 언급된 것은 1034년 테라지아의 방어군으로 고용하면서이다. 페르시아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는 발틱해를 바랑기안의 바다라고 불렀고 발랑기안들은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 문학에서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153년 에이나르 스컬라슨에 의해서인데 13세기 아이슬란드의 영웅담에 의하면 1000년경부터 바랑기안 방어군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주요 연대기에서는 바랑기안이라는 단어가 발틱해 근처의 지역에서 이나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Vaeringja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어로 ‘기원’이라는 뜻이 있으며 고대 영어의 Faergenga(탐험가)와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바이킹 시대

790년대에 처음으로 바이킹의 습격이 언급된 이래로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까지를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시대라고 부른다.(노르망디 공국도 8세기 덴마크 바이킹의 후예로 북부 프랑스에서 봉건질서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 바이킹의 후예들은 북유럽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서 잉글랜드 최후의 앵글로-색슨 국왕으로 1066년의 노르만 침공에서 사망한 해롤드 굿윈슨도 덴마크계 선조가 있다. 중세시절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국왕 중 다수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가와 결혼했으므로 이러한 문제는 왕가 내부의 갈등에도 기인한다.

지리학적으로 바이킹 시대는 스칸디나비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북독일 지역과 노텀브리아, 메르시아, 동 앵글리아를 포함한 데인로 지역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바이킹 모험가들은 동서남북으로 신천지를 찾아 떠났으며 셰틀란드, 오크니, 파로섬,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등지에 독립적인 정착지들을 형성했다. 이들은 1,000년 경에는 신대륙의 뉴펀틀랜드 랑스 오 메도우에도 정착지를 건설했었는데 그린랜드나 아이슬랜드를 포함한 이런 정착지들은 대부분 폭풍으로 항로를 이탈한 항해자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때로는 항해중에 우연히 먼거리에 있는 육지를 본 항해자들에 의해 신중한 탐사를 통해 발견된 경우도 있다. 그린랜드의 정착지는 아마도 기후변화 때문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은 이 외에도 동유럽의 슬라브 지역에도 진출해 950년 경에는 이들 정착지들이 대규모로 슬라브와 동화되었다.

839년 헤럴드 하드라다가 지휘하는 비잔틴 제국의 발랑기안 용병들이 북아프리카, 예루살렘을 비롯한 중동 각지에서 전투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 시대에는 비르카, 헤데비, 쿠팡, 요르빅, 스타라야 라도가, 노브고르다, 키에프 등지에 교역소가 건설되기도 했다.

바이킹들이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바그다드까지 진출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며 바이킹들은 볼가강 유역을 따라 이슬람 지역을 약탈하거나 교역해서 모피, 상아, 고기등을 실고와서 노예와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권은 보다 중앙집권화된 관계로 정착지를 건설하는데에는 실패했다.

일반적으로 노르웨이인들은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그린랜드를 비롯한 북서쪽으로 진출했으며 덴마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로 진출해 데인로와 노르방디에 정착했고 스웨덴은 동쪽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졌지만 여전히 유사한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왕들의 이름은 바이킹 후대에만 알려져 있다. 바이킹 시대가 끝나고 난뒤에도 정착지에 살아남은 왕국들은 점차 주변의 영향력에 흡수되고 기독교화되었다. 이로써 바이킹의 시대가 끝나자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짧은 중세가 시작되었다.

바이킹의 확장

바이킹은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으로는 러시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중동에 이르기 까지 북대서양 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해적이며 교역자 겸 개척자이자 용병으로 활동했다. 붉은털 에릭의 아들 레이프 에릭슨이 이끄는 일단의 바이킹들은 북미대륙에 도착해서 캐나다의 뉴폰틀랜드와 래브라도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랑스 오 메도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바이킹들이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으로 대대적인 진출에 나선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북유럽 역사의 주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이 시기에 농경의 영향으로 스칸디나 비아 지역의 인구가 급격하게 확장했기 때문에 이들이 팽창에 나섰다고 본다. 이들은 해안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해양 기술에서 우위에 있었고 인구의 증가는 해외확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르면 어째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륙의 미개척된 삼림지대가 충분히 남아있는 내륙보다 해외로 진출하는 것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물론 기후조건 때문에 식물의 생장이 제한되는 지역에서 숲을 개간하는 것보다는 바다로 나아가 약탈하는 것이 더 쉬웠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이러한 인구증가와 농업생산력 향상과의 관계는 명확히 규명되지 못했다.

또 다른 설명은 바이킹들은 주변 지역이 약화된 시기를 적절히 활용해서 확장에 나섰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서 덴마크의 바이킹들은 830년대에 시작된 샤를마뉴 제국의 분리와 그로 인한 유럽의 분열된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많은 수의 마을들이 해안이나 강가를 따라서 정착되어 있었다. 경쟁할만한 해양세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바이킹들은 서유럽 일대를 자유롭게 통행하거나 약탈 내지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고대 교역로들의 수익성이 감소한 것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서유럽과 유라시아 대륙 외부와의 교역은 5세기 경에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7세기 경에 이슬람이 확장한 것도 서유럽의 고립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바이킹들이 진출했을 때 지중해에서의 교역은 역사상 최저수준까지 떨어져 있었고 아라비아와 서유럽간의 교역을 독점함으로써 바이킹은 국제적인 교역로를 자신들의 상업영역내에 넣게되었다. 이때문에 프랑크 왕국이 바이킹을 견재하기 위해 유지해오던 프리지아 함대가 괴멸됨으로써 바이킹들은 교역로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바이킹의 쇠퇴

바이킹들이 유럽 각지에 정착하게 되자 이들은 유럽각지와 문화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로서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또, 외부의 위협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점차 필요해지고 그에 부흥한 세력들이 해안방어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바이킹의 습격은 점점더 위험부담이 커져가게 되었다.

성 올라프 전기의 73장에서 스노리 스털루손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노르웨이에 전해진 기독교는 초기에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추방당했고 성 올라프는 그 중의 일부를 상대로 손이나 발 또는 눈을 자르면서 이들에게 교수형을 당하던지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도 그 앞에서 처벌을 면치 못했다. “

새로운 봉건주의 체제가 스칸디나비아에 도입되면서 바이킹의 운명은 종말을 맞이했다. 11세기의 연대기에는 발트해 동부지역에서 공격해오는 바이킹을 맞이하여 덴마크와 스웨덴이 12세기와 13세기에 발틱 십자군을 결성하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이는 한자 동맹의 발달로 이어지게 된다.

바이킹의 무역이익에 있어서 중요한 교역품은 노예무역으로 기독교는 같은 기독교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었으므로 노예무역은 북유럽 일대에서 감소되었다. 그와 함께 풀려난 노예노동은 중세 사회의 최하위 계층인 농노가 대체하면서 약탈의 경제적 이익중 중요한 부분을 상실한 것도 바이킹의 활동을 약화시킨 한 요인이 되었다.

무기와 전법

바이킹 시대의 무기와 갑옷에 대한 지식은 고고학적인 유물이나 북유럽의 영웅담 또는 13세기의 북유럽 법률에 의존하고 있다.

관습에 의하면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자유민은 무기를 소지해야 하고 어느 때라도 소집에 응해야 했다. 이 무기는 바이킹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유한 바이킹은 투구, 방패, 체인메일과 검을 포함한 완전 무장을 갖추었다. 전형적인 자유민(Bondi)은 창이나 방패만을 소지하고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대부분은 식스(Seax)라고 불리는 단검을 보조무기로 소지하고 있었다. 육상 전투의 초반부에는 활도 사용되었지만 해전에서 활을 사용하는 것은 접근전용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명예롭지 못하게 여겨졌다. 바이킹들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도끼를 주요 무기로 사용했으며 크누트 왕(헤롤드 2세)의 친위대인 후스칼들은 방패나 투구도 쉽게 쪼갤 수 있을 정도의 대형 도끼로 무장했다.

고고학

신빙성 있는 문헌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바이킹 시대에 대한 역사적 조사들은 고고학에 의존하게 된다.

룬문자

바이킹 시대의 룬문자가 기록된 비석들은 대부분 스웨덴에서 발견된 것이며 10세기부터 11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룬 비석에는 바이킹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다수 기록되어 있으며 쿨라 룬스톤에는 서유럽 정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루링게 룬스톤에는 동유럽 원정 참가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룬스톤들은 바이킹 원정중에 사망한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 스웨덴 마라달렌 구역의 25 잉바르 룬스톤은 는 11세기 초 오늘날의 러시아 지역을 탐험하다가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룬 스톤은 바이킹의 활동 뿐만 아니라 고대 스칸디나비아 사회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사료이다.

또 룬스톤은 바이킹들이 배스, 그리스, 호라즘, 예루살렘, 이탈리아(랑고바르드), 런던 ,세클랜드, 잉글랜드 와 동유럽 각지를 원정한 증거이기도 하다. 바이킹이라는 단어 자체도 스칸디나비아에서 발견된 많은 룬스톤에서 발견된다.

배 무덤

바이킹들은 종교적인 관례에 따라 신분이 높은자가 죽으면 그가 사용했던 배를 함께 매장했고 무덤에 함께 있던 부장품들을 통해서 사후세계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많은 수의 배무덤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덴마크 예링, 노르웨이 오즈버르그, 노르웨이 곡스타드, 스웨덴 투나, 스웨덴 가믈라 웁살라

바이킹들의 배

바이킹들이 사용한 배는 드라카(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도 불리웠던 롱쉽과 나르(Knarr)로 구분된다. 롱쉽은 전투와 모험에 사용된 배로 속도와 조종성을 중시했으며 돛외에도 노를 장비해서 풍향에 관계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롱쉽은 선체가 길면서 홀수가 얕았기 때문에 얕은 물가에 접근해서 상륙하기가 쉽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나르는 상업용 선박으로 짐을 싣는데 적합하도록 되어 있었다. 노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어 항구에서 출발하는 상황이라던지 몇몇 한정된 경우에만 사용되었으며 보다 넓고 홀수가 깊은 선체는 비교적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바이킹들은 돛대에 베이타스를 추가해서 바람을 거슬러 갈때 조작하기 쉽도록 했다.

롱쉽은 주로 스칸디나비아를 방어하는 레이당에서 사용되었으며 바이킹 선박의 대표격이되었지만 이것은 주로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바이킹 이미지에 기인한 것이다.

로스클라이드 피요르드 부근에서 1960년 말에 발견된 유적지에는 5척의 바이킹 선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선박들은 11세기경에 코펜하겐을 방어하기 위해 수로를 봉쇄할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배들 중에는 나르와 롱쉽이 모두 확연하게 구분되며 로스클라이드의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전학적 연구

유전학적 다양성 연구는 바이킹 인구의 팽창과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Y 염색체의 특정 표시인 하플로그룹 I1은 바이킹 하플로그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변이는 스칸디나비아 남자들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특질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남성의 35%와 서핀란드인의 40$는 이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발트해 남부나 북해 연안 지역에서도 일반적이며 남쪽으로 갈 수록 급격히 줄어든다.

영국의 유전적 연구에 의하면 바이킹은 영국 본섬을 습격하면서 동시에 정착을 시작했다. 남녀 후손에 대한 연구는 세틀랜드나 오크니 섬 처럼 스칸디나비아에 가까운 섬지역에 노르웨이계 후손이 다수 존재함을 입증하고 그보다 떨어져 있는 본섬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계 후손들이 남성 유전자 비율이 상승한다.

또 리버풀의 성씨 연구로 약 50%에 달하는 남성이 산업화와 인구증가 이전에 건너온 스칸디나비아계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되었다. 비랄이나 서 랭카셔 등지에서도 이렇게 높은 비율의 스칸디나비아계가 확인되는데 이 것은 오크니 섬에서 확인되는 비율에 필적할 정도이다.

역사적 의견과 문화적 유산

영국에서 바이킹 시대는 793년 6월 8일 바이킹이 린디스파른 섬의 수도원을 파괴하면서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노덤브리아의 성지가 파괴되면서 유럽의 궁정에는 바이킹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으며 노덤브리아의 학자인 요크의 알퀸에 의하면 이러한 만행은 전례가 없을 정도라고 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을 넘어서 이후 1천년 이상에 걸쳐서 바이킹에 대한 야만적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했다. 1890년대까지 스칸디나비아 외부의 학자들은 바이킹의 유물이나 기술수준 및 항해술에 대해서 진지한 연구를 시도하지조차 않았다.

바이킹에 대한 편견어린 시각에 대한 첫번째 도전은 17세기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영국내의 바이킹 정착지 발굴조사가 선구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바이킹 시대의 방언들과 속담, 속어들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졌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어에 대한 언어가 성과를 거두어 사전이 출간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주요한 아이슬랜드 모험기들이 번역되었다.

17세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덴마크의 학자 토마스 바르톨린과 올레 웜 및 스웨덴의 올로프 루드벡 등이 처음으로 아이슬랜드의 모험기들과 역사적인 자료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북구 르네상스의 개화기에 스칸디나 비아 역사학자들은 보다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접근했으며 덴마크의 역사학자 루드비히 올버그와 스웨덴의 역사학자 올로프 폰 달린들이 중요한 연구를 했다. 최근까지 바이킹 시대의 역사는 주로 아이슬랜드의 전승 영웅담과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역사, 러시아의 연대기들과 아일랜드의 외세투쟁기 등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문헌을 신빙성있는 자료로 받아들인 학자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고고학과 수치추정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에는 영국에서 바이킹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이들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중세 영국의 연대기들은 이들을 양 틈의 늑대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었으며 1920년대에는 신형 로버 자동차의 라디에이터 캡에 날개달린 투구를 쓴 바이킹이 그려짐으로써 영국에서 흔히 받아들여지는 바이킹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아이슬랜드 사가와 다른 문헌자료들

북구 신화와 시가 및 문학은 스칸디나비아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는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고 있으며 후대에 문서화된 것은 아이슬랜드의 스노리 스터러슨과 새먼더 프로비 등 기독교 학자들에 의한 것이다. ㅇ이 영웅담들의 대부분은 아이슬랜드에서 기술된 것이며 대부분은 아이슬랜드 이외의 지역에 대한 기술이 없지만 중세 시대 이후에도 아이슬랜드 인들은 북구의 문학과 법률을 유지해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이킹은 200년간에 걸쳐서 유럽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거주지를 약탈했다. 그들에 대한 연대기들의 대다수는 서유럽의 증인들과 후손들이 기술한 것이다. 한편 동유럽에는 다양하긴 하지만 서유럽의 그것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네스토리우스 파의 연대기, 노브고르드 연대기, 이븐 파들란 연대기, 이븐 루슬란 연대기를 비롯해서 비잔틴 제국에 대한 공격을 회상하는 포시오 추기경의 언급들이 남아있다.

브레멘의 아담이 기술한 ‘함부르크 주교들의 연대기(Gest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um)’ 4권에는 “이곳(질랜드)에서 해적들은 많은 보물을 약탈해갔다. 이 해적들은 스스로를 위칭기(wiching)라고 부르고 우리는 아스코마니(Ascomanni)라고 부르며 덴마크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바이킹 시대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취급된다. 991년 바이킹과 에섹스 의 말라돈에서 있었던 말라돈 전투는 무훈시로 만들어져 기억되고 있다.

현대 바이킹의 부활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올라우스 마그너스의 ‘북방민족의 역사(historia de gentibus septentrionalibus, 1555)’라던지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데인인 이야기(Gesta Danorum, 1514)’ 초판 등, 바이킹 문화에 관한 서적이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17세기에 페데르 레센의 ‘아이슬랜드 이야기(Edda Islandorum)’를 비롯한 에다(Edda, 북유럽의 무훈시)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바이킹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해갔다. 한편 1809년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패하며 600년간 지배해온 핀란드를 잃게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영광스럽고 용맹했던 과거의 신화를 되살리고 싶어했던 스웨덴의 고트족 협회(Geatish Society)는 바이킹 신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이 단체의 회원이었던 에릭 구스타프 예이에르가 서사시 바이킹(The Viking)을 쓰면서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바이킹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역사적인 바이킹의 실체를 떠나 보다 낭만적이고 이상화된 바다의 전사로 형상화된다. 같은 고트족 협회원이었던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er)는 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 ins frekna)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북구권 국가에서 바이킹의 이미지를 널리 알렸다.

영국에서는 언어의 제측면(Linguarum Vett. septentrionalium thesaurus, 1703~1705)를 저술한 조지 힉스가 바이킹 붐을 선도했다. 18세기에 영국은 아이슬랜드와 북구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바이킹 서사시 등이 다수 번역되어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관심이 절정에 달했다.

나찌즘과의 관계

나찌를 비롯해 바그너의 영웅주의에 심취해있던 게르만 우월론자들은 같은 게르만 계통의 영웅적인 바이킹을 이상적인 전사상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 국가사회주의당(Nasjonal Samling)은 바이킹을 상징으로 삼고 자신들의 정치선전에 널리 사용했으며, 발트해 북부를 포함한 북유럽 지역에서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바이킹이 크게 대중의 호감을 끌어낼만한 요소가 아니었으므로 나찌는 자신들이 바이킹의 후예라고 선전하는 대신에 유전학과 역사학적 증거를 통해서 앵글로 색슨과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간의 인종적 공통점, 문화와 언어학적 단서들을 통해 바이킹이 게르만 계의 후손에 해당함을 입증하려 했다. 특히 이들은 독일의 무신론 적이고 실용적인 론문자에 주목해 이들을 국가사회주의의 상징물로 삼았다. 예를 들어서 나찌 친위대 SS의 상징으로 룬문자를 사용했고 바이킹 유겐트에서도 룬문자를 자주 사용했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네오나찌도 공통적으로 이어받은 특징의 하나이다.

리인액트

1960년대 이후로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리인액트가 붐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리인액터들의 고증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나 점차 그 수준이 향상되었다. 리인액터들 중에서도 바이킹과 영국 침략(Regia Anglorum)을 주제로 삼는 그룹은 영국과 북미,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규모가 크다. 이들은 보통 금속 무기를 이용해서 재현을 하지만 일부 그룹들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것과 유사한 배를 사용해서 참가하기도 한다.

2007년 7월 1일에는 바이킹 선박 ‘스컬델레브’(Skuldelev)를 복원한 시 스텔리온이라는 이름의 배로 덴마크의 로스클라이드에서 아일랜드의 더블린까지 항해를 시도했다. 이 배는 1962년 로스클라이드 피요르드 탐사에서 발견된 4척의 배중 하나를 복원한 것으로 복원에는 바이킹들이 사용한 도구만을 사용했다. 이 배에 사용된 목재를 조사한 결과 아일랜드의 나무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자 다국적 고고학 실험을 위해 70명의 선원이 탑승하여 배를 2007년 8월 14일에 더블린까지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 항해의 목적은 복원된 바이킹 선의 항행성능과 속도, 조종성등을 실제 항해를 통해 실험하는 것이었으로 선원들은 이 길고 좁으며 유연한 선체가 어떻게 북해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했다. 조사팀은 바이킹 롱쉽과 그 사회에 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확인했다.

바이킹을 소재로 한 작품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같은 오페라가 묘사한 낭만적인 바이킹 상은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프란츠 귄나르 벵손의 The Long Ship은 196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바이킹 에릭(Erik the Viking)이라는 코메디 영화도 있다. 바이킹은 덴마크계 미국인 작가 폴 앤더슨의 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바이킹 메탈 장르는 바이킹 신화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음악장르로 1990년대 초에 블랙메탈의 한 장르로 유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가사에 북구 신화나 바이킹의 생활방식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널리 알려진 바이킹에 대한 오해들

뿔달린 투구

뱀이나 까마귀를 형상화 한 제식용 투구 2~3개를 제외하고는 바이킹 시대의 전사들이 사용한 헬멧중에는 뿔이 없다. 사실 바이킹 시대의 근접전은 방패를 벽처럼 잇대어서 싸웠으므로 투구에 뿔리 달려있을 경우에는 오히려 착용자가 위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바이킹 전사들은 뿔이있는 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이러한 형태의 투구가 스칸디나비아 문화권에서 실제로 실제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식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바이킹 전사들이 뿔달린 투구를 사용했다는 널리 알려진 오해는 주로 19세기의 스톡홀름의 고트족 협회가 사기를 고취시키고 예술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져있는 바이킹 복장은 날개달린 투구에 북구신화의 신들을 본따서 만든 전통적인 무구를 장비한 형태이고 이것은 유럽 문화의 고대 전사상을 이상화한 것으로 바이킹 시대보다 2천년 전인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제사용 투구의 뿔장식을 이용했다.

바이킹 비키나 호러플 해거같은 만화나 미네소타 바이킹스, 캔버러 레이더스 같은 미식축구팀의 마스코트 등에 사용된 바이킹 모습은 뿔달린 투구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 바이킹들이 사용한 투구는 보통 가죽 제질에 금속 테를 추가한 형태로 되어 있다. 마스크가 있는 철제 투구와 체인메일은 족장들이 사용한 것이며 유일하게 발견된 진품 바이킹 투구는 노르웨이의 예문부(Gjermundbu)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10세기 경의 것이다.

해골잔

인간 두개골을 술잔으로 사용했다는 것도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이 전설은 올레 웜의 고대 덴마크 문학(Runer seu Danica literatura antiquissima, 1636)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덴마크 전사들이 or bjugvioum hausa(뿔처럼 두개골에서 파생된 휘어진 돌기)에 술을 마셨다는 말이 와전되어 ex craniis eorum quos ceciderunt(살해한 사람의 두개골)로 술을 마셨다고 된 것이다. 두개골로 술을 마시는 관습은 다른 게르만 계통 부족이나 스키타이인, 롬바르드족 등의 유목민들과 연관이 있다.

불결함

바이킹은 일반적으로 거친 며리결에 지저분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는 바이킹의 습격에 살아남은 스칸디나비아 외부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했던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특히 브레멘의 아담이 남긴 작품들이 바이킹의 야만성과 불결함에 대한 오해를 낳는 주 원인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바이킹은 개인 위생 및 치장을 위해 빗이나 면도기, 귀후비개 같은 도구를 다수 사용했으며 머리빗은 바이킹 시대의 부장품 중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바이킹들은 비누를 만들어서 사용했으며 바이킹 문화에서는 금발머리를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머리를 탈색시키는 데에도 사용했다. 영국의 바이킹들은 다른 앵글로 색슨족들과는 달리 매주 1회씩 목욕하는 관습 때문에 ‘과도하게 청결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바이킹은 토요을을 목욕하는 날(laugardagur)이라고 불렀다.

동유럽으로 진출한 바이킹에 대한 기록에서 이븐 루스타는 그들의 청결함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븐 파들란은 세수대야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과 아침에 코를 푸는 관습에 대해서는 역겹다고 평을 남겼다. 이븐 파들란이 이를 역겨워 한 것은 흐르는 물과 개인 그릇을 사용하는 이슬람 세계의 관습에서과 다르기 때문이며 러시아 인들의 관습에 대한 역겨움을 적으면서도 매일 아침마다 세수를 한다는 점은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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