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Ship and Sail

마법사인가 수학자인가, 존 디의 삶

생애

공식활동

런던의 타워와드 출신으로 디라는 성은 웨일즈 어로 '검다'는 뜻이다.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롤랜드 밑에서 디는 클렘스포드의 가톨릭 학교(오늘날의 킹 에드워드 6세 문법학교)를 졸업한 후 1543년부터 46년까지 캠브리지의 성 요한 대학을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재능으로 유명했던 디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fellow)이 되었으며 154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르우벤과 브뤼셀에서 공부하고 파리 대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젬파 프리지우스와 함께 공부하면서 지리학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와 친구가 된 그는 10년후에 중요한 수학, 천문학 기구들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디는 1554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과 학장직을 제안받았지만 저술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가 이 자리를 거절한 것은 궁정에서 더 좋은 조건의 자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디는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당시 공주)의 운명을 '계산'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디는 알현실에 드러내어 자신을 변호했지만 보너 대주교는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이 재판에서 디의 신비주의 취향은 상황을 악화시켰으나 결국 종교재판에서는 무혐의로 풀려난 디는 나중에 보너 대주교와 친구가 되었지만 나중까지도 이 문제는 디를 시기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메리 여왕의 가신이 된 디는 고서적과 문서, 기록들을 보관하는 국립도서관 건립계획을 제출했지만 1556년 그의 간청은 기각되었고 이에 실망한 디는 개인적으로 몰트레이크에 있는 자신의 도서관을 확장해 정력적으로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책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도서관은 대학에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어 많은 학자들을 불러모으게 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면서 디는 점성술과 과학문제에 대한 조언자로 많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여왕의 즉위식 날자를 고른 것도 디로 약 20년에 걸쳐서 디는 잉글랜드의 탐험항해에 있어서 기술적인 조언자이며 대영제국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제창자로 활약했다. 1577년 디는 '완벽한 항해기술 연마를 위한 일반적이면서도 희귀한 기억의 모음'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신대륙에 잉글랜드가 식민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비전을 상세히 기술했으며 험프리 길버트나 필립 시드니 경과 같은 인물들도 그와 친밀한 관계였다.

1564년 디는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라는 책을 저술하여 상형문자와 신비주의를 결합시켜 모든 생명체의 통합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디가 저술한 해석집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의미를 알수는 없으나 디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의 저술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1570년에는 헨리 빌링슬리가 영어로 번역한 유클리드 기하학을 "수학의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해서 수학의 다른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했으며 동시대의 대학에서는 이를 디의 가장 영향력있는 저술로 인정하고 있었다.

신비주의

1552년에는 보석을 이용한 영구운동기관의 가능성을 연구했을 정도로 젊을 때부터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디는 1580년대부터 자연계의 비밀 탐구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과 지식에 한계를 느끼고는 점차 신비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수정 구슬을 이용해서 천사와 소통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한동안 '천계와의 소통'계획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1582년에 에드웨드 캘리를 만나면서 그의 연구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회의주의자이면서도 대단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었던 에드워드 캘리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화려함이 있는 인물로 그와 함께 디는 전력을 다해 신비주의를 파고들었다. 이들은 기독교의 신비주의에 기초해서 기도와 금식을 통한 정화로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디는 이를 통해서 얻은 '천상의 지식'이 인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천사들과의 대화를 '에녹어'라고 하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1583년에 디는 폴란드의 귀족 알버트 라스키를 만나서 폴란드 궁정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천사들과 교감을 한 끝에 디는 잉글랜드를 떠나는 여행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디와 캘리 및 가족들은 1583년 9월에 유럽으로 향했으나 폴란드에 도착하자 라스키는 이미 파산한 데다가 국내에 적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 정착할 곳이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후 디와 캘리는 중부 유럽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영적인 교감은 중단하지 않았고 디는 꼼꼼하게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디는 루돌프 2세 황제와 폴란드의 스테판 국왕 앞에서 불신앙을 꾸짖으며 천사와의 대화가 갖는 중요성을 설득시키려 했지만 두 궁정에서 모두 거부당했다.

보헤미아에서 영적인 교감을 갖던 1587년에 켈리는 디에게 우리엘 천사가 아내를 교환해야 한다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당시에 막 주목받기 시작한 켈리는 이런 무리한 요구로 존 디와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던 듯 하다. 디는 이 요구에 분노해서 관계를 단절하고 다시는 켈리를 만나지 않았으며 1589년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말년

몰트레이크의 서재로 6년만에 돌아온 디는 자신의 귀중한 서적들과 기구들이 도난당한 것을 발견한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읍소한 끝에 1592년 멘체스터 기독교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학교는 1578년 이후 성직자 교육기관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육기관으로 거듭난 곳이었다.

말년에 들어선 존 디는 동료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수차례 사기를 당한데다가 자녀를 마법의 숫자인 7명 양육했다는 이유로 주술을 사용했다고 재임중에 기소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도서관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다. 1605년 멘체스터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온 디는 엘리자베스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신비주의에 관심이 없었던 새 국왕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디는 말년을 몰트레이크에서 빈곤하게 지내며 자신과 딸 캐서린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소중한 수집품들을 팔아치워야 했다. 디는 1608년 말 또는 1609년 초에 82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개인적인 삶

디는 두번의 결혼을 통해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번째 결혼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65년에 결혼해서 1576년 쯤에 첫부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577년부터 1601년까지 디는 일기에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다 적어놓았는데 1578년에 그는 51세의 나이로 23살의 제인 프로몬드와 재혼했다. 캘리가 우리엘이 아내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을때 이 젊은 아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제인은 1605년에 멘체스터에서 역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자녀를 낳았다. 데오도어는 멘체스터에 있을때 사망했지만 그외에 다른 딸 매디니아, 프랜시스 마가렛에 관한 자료는 디가 이후에 일기 작성을 중단해서 불분명하다. 그의 장남인 아서 디가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재학중일때 기숙학교 사감에게 디가 보낸 편지가 남아있으며 아서는 나중에 연금술과 점성술사가 되었다. 존 오브리가 남긴 디에 관한 묘사를 보면 “그는 키가 크고 멋쟁이로 예술가들이 입는 가운을 입고 긴 소매옷을 입었으며… 아주 멋지고 청결한 사람으로… 긴 수염은 우유처럼 하얀 미남이었다.”고 한다.

업적

사상

디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신비주의와 점성술 및 르네상스 시대에 인기있던 플라톤-피타고라스 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숫자는 만물의 근원이며 지식의 핵심이라고 보았으며 신의 창조도 숫자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신비주의자로서 디는 모든 인간이 신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수학을 통해서 그런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카발라를 비롯한 신비주의에 대한 집착과 항해등과 연관된 실용 수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과 미신이 대립적인 오늘날과는 달리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디가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의 통합과 고대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명성과 인지

디가 죽은지 10년후, 골동품 수집가였던 로버트 코튼은 디가 말년을 보낸 집과 그 주변 토지를 구입해서 다양한 서류와 기구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는 디가 시도했던 ‘천상의 대화’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을 수집했으며 코튼의 아들이 이 서류들을 학자인 메릭 카소본에게 넘겨주어 1659년에 저자에 대한 비평을 곁들여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국왕 및 그의 궁정에서 명망높은 수학자였던 존 디 박사와 영혼이 수년간 이어온 진실되고 신뢰할만한 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고 영혼의 존재를 믿고있던 카소본은 디가 악령에게 속아서 수년간 천사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었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2세기 반에 걸쳐서 존 디가 어리석은 몽상가로 비춰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진실되고 신뢰할만한 관계’가 출간됨과 동시에 장미십자회원들이 디를 조직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디가 살아있던 시절에 장미십자회가 존재했는도 의문이며 그가 비밀단체에 가입했었다는 증거도 없다. 디의 마술사로서의 명성과 에드워드 캘리와의 관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들은 그를 우화작가들과 공포소설가 및 훗날의 마술사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어 디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더 살이 붙어 몽상적인 이야기로 다양하게 각색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역사가 프랜시스 예이츠가 르네상스 시대의 마술이 현대의 과학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면서 존 디의 인물과 삶도 재조명되면서 디는 진지한 학자이며 당대의 가장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던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몰트레이크의 개인도서관은 당대에 영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도 최고수준을 자랑했고 데투(de Thou)의 것 다음으로 훌륭했다고 알려져 있다. 천문학과 과학에 기초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리학적 조언자로 일했을 뿐 아니라 그는 북미대륙의 식민지화를 통해 북대서양에 걸친 대영제국 건설을 제창한 인물이기도 하다. 디는 지리학과 측량학의 대가로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와도 친밀했으며 다양한 지도와 지구본 및 천문학 기구를 수집했다.

피타고라스의 수리적 신비주의에 심취한 디는 수학이야말로 인간 학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보다 근대적인 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은 디가 그러했듯 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이해하면서도 제임스 1세 시대의 반신비주의적 분위기에 맞추어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수학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의 관점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디는 수학을 통해서 우주에서 일어나는 실체적인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보았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 수학을 고급교육을 거친 사람이 아니라도 접할 수 있도록 대중화 시켜 공학자라는 새로운 기술계층의 양성에 이바지했다.

디는 티코 브라헤의 친구이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천문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천동설에 반하는 견해를 밝히지는 않았다. 디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적용해서 달력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서 그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디는 또한 보이니치 문서와 함께 거론되는 인물로, 1912년에 이 문서를 구입한 윌프리드 M 보이니치는 루돌프 황제에게 이 문서를 200두카트에 매각한 사람이 디였으리라고 보았다. 디는 루돌프와 이 책에 대해서 접촉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디의 일지에 판매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는 또 다른 암호서적인 소이자 북의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물들

영국 박물관에는 디와 관련되었거나 그가 소유했던 ‘영적 회합’에 관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디의 거울 : 1520년 경에 유럽에 유입된 것을 보이는 아즈텍의 흑요석 거울로 호레이스 월폴이 소유하던 것
작은 봉인용 왁스 : 디가 수정구슬로 점을 칠때 사용하던 탁자를 고정할 때 사용 한 물건
큰 봉인용 왁스 : “신의 봉인”, 수정 구슬에 광을 낼때 사용한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왁스
켈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금 목걸이
수정 구슬 : 반지름 6cm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디가 잠시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 다만 다른 유물에 비해서 진짜로 디의 소유였는지는 불확실한 편이다.

소설속의 디

디는 일생동안 마술과 신비주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 때문에 환타지 소설에서 인기있는 캐릭터이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나오는 프로스페로의 모델이기도 하며, 벤 존슨의 희곡 ‘연금술사’에서 나오는 영혼의 이름이 디이다. 아일랜드의 고전 소설가 챨스 마투린은 디와 캘리를 자신의 소설 멜모스와 원더러에 등장시켰으며 H.P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던위치의 공포에서 디는 사령술(Necronomicon)을 영국에 도입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추에서 디는 “플랜”의 핵심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를 다루는 환타지 소설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리사 골드스타인의 ‘연금술사의 문’에서는 디가 랍비 유다 로우와 공동으로 골렘을 만들어낸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이클 스콧 로저 하이필드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디 박사는 니콜라스 플레멜과 적대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이때문에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알버스 덤블도어의 모델이 디라는 주장도 있다.

또 DC 코믹스에서 과학과 마법에 모두 정통한 수퍼악당중 닥터 데스티니의 본명이 존 디로 그는 꿈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

'History > Ship and Sa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킹  (6) 2009.04.30
철갑선의 기술과 전술  (2) 2009.04.23
갤리 6. 갤리선 시대의 종말  (0) 2009.03.29
갤리 5. 중세의 갤리  (0) 2009.03.28
전열함 -2  (2) 2009.03.27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0) 2009.03.18
코그 Cog  (0) 2009.02.02
컨셉시온 호와 윌리엄 핍스  (0) 2009.01.03
루땡호의 종  (0) 2009.01.02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1) 200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