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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가와 코지, 신속의 공격

타니가와 코지(谷川浩司) (1962년 4월 6일 ~ ) 기사 번호131. 17세 명인. 통산타이틀 획득수 역대 4위. 와카마츠 마사카즈7단 문하. 효고현 코베 시 스마 출신. 일본장기연맹 기사협회 초대회장.

프로데뷔까지

5살 무렵, 5살 터울 형과 자주 싸우다 보니 아버지가 일본장기와 체스를 가르쳐서 처음 일본장기를 배웠다. 규칙은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다고 하며 효고현 대회에 나가면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덧붙여서 장기를 배운뒤에도 형제간의 싸움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형인 도시아키도 프로기사는 아니지만 동경대 재학시에 장기부에 있었고 졸업후에도 명문인 리코 장기부에 재적하면서 아마츄어 일본장기계의 타이틀을 수차례 획득한 강호다. 잡지의 기획대국에도 가끔 나오고 4단시절 하부 요시하루를 평수로 대국하여 이긴 적도 있다.

프로를 목표로 한 코지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된 1973년 4월 5급 장려회에 들어가 이후 순조롭게 승단을 거듭해 중학교 2학년때인 1976년 12월 20일, 4단으로 승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다. 가토 히후미 이래 사상 2번째 중학생 기사의 탄생이었다. 가토 히후미가 1월생으로 최연소 프로데뷔 기록 보유자지만 타니가와 코지는 4월생으로 유일한 중학교 2학년 이하 데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연표

1983년 사상 최연소 명인이 되어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1991년에는 4관왕까지 거머쥐었지만 결국 새 시대를 열은 것은 타니가와가 아니라 하부 세대였고 타니가와는 이후 숙적 하부 요시하루와 150국 이상의 불꽃 대결을 벌여왔다. 하부 요시하루와 타니가와 코지의 대결은 언제나 일본장기팬을 매료시키는 골든 카드.

사상 최연소 명인

중학생 기사로 주목을 받으며 프로에 데뷔한 타니가와는 순위전(명인전 예선)에서 첫 1기(77년) C급2조로부터 C급1조로 승급하는데 2년 걸린 것을 제외하고 1978년 젊은 기사들의 등용문이라고 불리는 어린사자전(수상자 대부분이 A급 기사가 되었다.)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 이후 매년 1기씩 4년 연속 승급해서 1982년 4월 1일, A급 8단이 되었다. 그달에 있던 제40기 명인전은 나카하라 마코토와 가토 히후미의 7번국까지 이어지는 접전에 더해 비긴 장기 1회, 천일수 2회로 ‘10번국’이라는 대 승부였다. 최종국에서 방송 해설을 맡았던 것이 타니가와였는데 당시 ‘가토 선생님께는 미안하지만 나카하라 명인이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해서 해설하기가 곤란했다’고 술회했다. 마침내 명인위에 오른 가토 히후미에 도전권을 놓고 겨루는 A급 순위전에서 타니가와는 7승2패, 조1위로 나카하라 마코토를 꺽으며 제41기 명인전에 도전하게 된다.

타니가와는 3승 2패로 맞이한 제6국에서 가토를 격파하여 첫번째 타이틀을 명인위로 획득. 1983년 6월 15일, 사상 최연소 명인(당시 21세)에 등극했다. [각주:1] 이 타이틀의 회견에서 "1년간 명인위를 맡겠습니다"라는 겸허한 자세를 보인 타니가와는 그해 7월, 제2회 전일본프로장기 토너먼트에서 동기인 다나카 토라히코를 꺽고 첫번째 우승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각주:2]

1984년에는 첫타이틀 방어전이 된 명인전 42기에서 꾸준한 기풍으로 ‘달마류’라는 별명이 있는 모리야스 히데미츠를 상대해 4:1로 명인위 방어에 성공, ‘약한 명인에서 보통의 명인은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같은해 제44기 기성전에서도 요네나가 쿠니오 기성에 도전, 명인 대 3관왕의 대결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제1국에서 상대의 보 숫자를 잘못 헤아려 패배, 제2국에서는 요네나가의 ‘수렁류’에 끌려다니다가 역전패하면서 타이틀 기전에서 첫 패배를 당한다. 여기서 압승을 거둔 요네나가는 이윽고 나카하라에게서 십단위를 빼앗으며 4관왕을 달성, 타니가와, 나카하라 두 명인을 꺽으면서 ‘장기계 최강의 기사’라고 불리웠다.

1985년, 3번째 방어가 되는 제43기 명인전에서 4-2로 나카하라에게 명인위를 내어주었고 왕좌전에서도 나카하라에게 패했지만 전일본 프로는 3연패, 키리야마 키요시를 꺽고 기왕위를 획득했으며 NHK배 우승, 첫 최다승(56승) 등의 활약으로 장기 대상에서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4관왕으로

1986년부터 타니가와는 ‘55년조’의 한명인 타카하시 미치오와 3연속 타이틀전을 갖는다. [각주:3] 제12기 기왕전에서 타카하시가 선수 차례에서는 서로 망루전법, 타니가와가 선수 차례에서는 각행교환 봉은으로 서로가 상대의 주특기 전법에 도전하는 형세였지만 결국 각행교환에서 패하며 기왕위를 잃었다. 이로써 타니가와는 무관으로 물러났지만 2년 연속 최다 승리상을 수상(47승)했고 이듬해 제28기 왕위전에서는 4-1로 왕위를 타카하시에게서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또, 제13기 기왕전에서도 타카하시에게 빼앗긴 기왕위를 복구해 처음으로 2관왕에 올랐으며 2번째로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기세가 오른 타니가와는 1988년 나카하라 마코토 명인에게 도전권을 획득한다. 비록 3-1로 앞서나가다 제5국째에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결국 6번국에서 명인위를 빼앗아 생애 최초로 삼관왕이 되었지만 제29기 왕위전에서 종반의 마술사 모리 게지에게 패하고 제14기 기왕전에서는 ‘55년조’의 통칭 ‘지장보살류’라 불리우는 미나미 요시카즈에게 패배 왕위와 기왕위를 잃고 명인으로 물러났다. 그래도 1989년, 명인전에서 요네나가 쿠니오를 상대로 명인위를 지켜내고 제30기 왕위전에서는 모리 게지에게 설욕 2관왕으로 복귀했다.

1990년, 제48기 명인전에서 타니가와는 또다시 나카하라에게 명인위를 빼앗겼지만 제38기 왕좌전에서 나카하라를 상대로 왕좌를 빼앗아 2관왕에 복귀했고 제31기 왕위전에서는 사토 야스미츠를 상대로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방어에 성공한다. 이해의 제3기 용왕전에서는 하부 요시하루에게서 용왕을 획득하고 두번째 3관왕을 달성하면서 3번째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이 용왕전은 하부 요시하루와 타이틀 전에서는 첫만남이었는데 스코어는 4-1이었지만 나중에 타니가와는 203수까지 이어진 제4국에서 하부에게 패배해서 4-0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그 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큰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아무튼, 해가 바뀌어 1991년, 타니가와는 최전성기에 오르게 된다.

제32기 왕위전에서는 나카타 히로키를 꺽은 상황에서 제39기 왕좌전의 상대는 ‘55년조’의 한사람인 후쿠자키 분고. 과거 타니가와에게 ‘감각을 파괴당했다’고 말할 정도로 호되게 당했던 후쿠자키였지만 동굴곰 울타리의 명수로 발전한 후쿠자키가 선보이는 방어앞에 2국을 연속으로 내어주면서 결국 타니가와는 왕좌를 내주고 2관왕으로 후퇴하고 만다. 하지만 제4기 용왕전에서 ‘모리시타 시스템’으로 유명한 모리시타 타쿠를 꺽었고 제59기 기성전과 제41기 왕장전에서 연속으로 미나미 요시카즈를 꺽으면서 7개의 타이틀을 모두 한번씩은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무엇보다 오오야마 야스하루, 나카하라 마코토, 요네나가 쿠니오의 뒤를 잇는 사상 4번째 4관왕에 오른다.(덤으로 생애 4번째 최우수 기사상도 수상)

하부세대와 대결 1

1992년 타니가와는 타이틀전을 6번 치르는 데 그 중 3번의 상대가 하부세대였다. 고다 마사타카를 상대로 전, 후기 기성전 제60기와 제61기에서는 연속 방어에 성공했지만 제33기 왕위전에서는 패배해 고다 마사타카에게 최저단 타이틀 획득 기록(당시 4단) 달성을 지켜보게 되었다. 게다가 제5기 용왕전에서는 하부 요시하루에게 패해 2관왕까지 후퇴. 제42기 왕장전에서는 무라야마 사토시를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지만 제18기 기왕전에서는 하부 요시하루와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1993년 타이틀전을 놓고 하부 요시하루와 계속 접전을 벌였지만 제62기 기성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에게 3-1로 패배하면서 타이틀전만으로 3연패를 당하자 스스로가 ‘하부에게는 약하다’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게다가 제41기 왕좌전에서도 하부에게 패했다. 왕장 타이틀만 남은 상황에서 다섯번째로 하부와 대결한 타이틀전이 제63기 기성전에서도 1국과 2국에서 2연패를 당해버렸다. 이 제2국에서 하부 요시하루는 종래 일본장기의 상식을 벗어난 수순을 보여주었는데, 초반 일찌감치 18수째에서 △4二각으로 끌어들여 4四의 보를 그냥 내어주고, 타니가와의 옥을 쫓고있던 7九의 토금을 9九의 향차를 잡기위해 2수를 손해본데다가 △8九토금(56수째) - △9九토금(58수째)으로 후퇴시키는 등 악수를 거듭하면서도 난전끝에 마지막에는 하부가 승리를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2연패를 당하고도 타니가와는 천일수 2회로 인한 일정연기 후, 끈기있는 버티며 2승을 거두어 풀세트까지 몰아갔고 2승째는 불과 49수만 상대를 투료로 몰아가는 저력을 보였지만 최종국에서 망루 대결에 패하며 결국 기성위 탈취에 실패했다.

제43기 왕장전에서는 나카하라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하부는 이해에 사토 요시미츠에게 용왕위를 내주긴 했어도 기성과 왕위를 획득, 4관왕을 거머쥐면서 전관왕에 도전하는 상태였다.

집념과 굴욕

1994년 타니가와는 제64기 기성전, 제42기 왕좌전에서 하부를 상대로 연패를 당한다. 이때 하부 요시하루는 양대 타이틀로 꼽히는 명인위와 용왕위를 각기 요네나가 쿠니오, 사토 야스미츠에게서 빼앗아 사상 최초의 6관왕에 오른 상태로 전관왕까지 타니가와의 왕장위만을 남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제44기 왕장 리그에서 5승1패로 고다 마사타카와 나란히 플레이오프를 제압하고 하부 요시하루는 타니가와 왕장에 도전했다.

하부의 전관왕 달성여부가 달린 제44기 기왕전, 타니가와는 일단 제1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제1국과 제2국(1월 23일 ~ 24일)사이에 한신 대지진(1995년 1월 17일)이 일어나 타니가와는 피난길에 올랐다. 20일에는 요네나가 쿠니오와 A급 순위전이 있으므로 19일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고베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지만 이 거리를 가는데 차속에서 무려 13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타니가와는 요네나가에게 이기고 하부에게도 승리를 거두는 투지를 보였다. 하부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3:3으로 팽팽해진 상황에서 제7국은 2일째 76수로 천일수가 성립, 다시 장기를 두게 되었다. 선후수가 바뀌었지만 40수까지 천일수가 된 대국과 똑같은 수순이 이어지고 ‘서로의 의사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하는 상황에서 41수째, 타니가와는 수를 바꾼다. 결과는 111수째로 타니가와의 승리, 4승3패로 하부를 꺽으며 왕장위를 지켰을 뿐 아니라 전관왕 재패를 가로막은 불굴의 투지가 빛나는 사건이었다. 이 최종국이 있던날 대국장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호텔에는 일본장기계의 취재로는 이례적인 수의 보도진이 대거 운집해 있었으나 승리한 것은 타니가와 보다 매스컴의 주목은 하부에게 몰린것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타니가와는 ‘지진이 없었다면 패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이때의 상황을 술회했다.

1995년 하부는 시즌 개막이후 명인, 기성, 왕위, 왕좌, 용왕위를 모조리 방어하고 다시 왕장리그에 우승하여 2년 연속으로 타니가와 왕장에 도전했다.

이 제45기 왕장전에서 하부는 단숨에 3연승을 거두며 타니가와를 몰아붙였다. 야마구치현 마린피아에서 열린 제4국, 경기는 이기건 지건 큰차이를 내기 쉬운 횡보잡기로 진행되어 타니가와는 선수차례에서 나카하라 울타리를 짜는 새로운 형태를 선보였다. 2일째에는 NHK에서 오전 9시부터 끝날때까지 위성중계라는 파격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중계회장에도 많은 관전객들이 몰려 중계하는 모리시타 타쿠나 야마다 쿠미는 사람 열기로 땀을 흘릴정도였다.

이 대국에서 37수째에 타니가와는 후회할만한 수를 두었고 오후 3시쯤에는 이미 하부의 우세가 확연한 상태, 더이상 옥을 방어할 수 없게된 타니가와는 77수, 79수째를 수비보강에 할애했지만 외통에 들어간 하부는 결국 82수째에서 타니가와를 투료로 몰아갔다. 오후 5시 6분. 타니가와에게는 굴욕적이었지만 전인미답의 7관왕 탄생이었다. 팽팽한 접전이었던 작년과 달리 4전4패로 어이없게 타이틀을 내준 타니가와는 인터뷰에서 ‘모처럼 주목을 받았는데 하부 씨에게도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날 하부는 감기때문에 컨디션이 안좋은 상태였지만 ‘져도 어쩔수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홀가분하게 둘 수 있었다’라고.

재기

하부에게 7관왕을 헌납했지만 이듬해, 1996년 제9기 용왕전에서 조2위로 본선진출권을 따낸 타니가와는 도전자 결정 3번국에서 사토 야스미츠를 2:0으로 격파하고 하부 용왕에 도전해 4-1로 설욕에 성공했다. 이 7번국의 제2국, 제 80수째에 타니가와가 7七계를 친 것은 ‘광속의 몰아가기’ 부활을 알리는 것으로, 큰 의미가 없어보였지만 이 한수를 경계로 하부의 옥은 순식간에 외통으로 몰리면서 타니가와가 승리를 가져갔다. 당시 NHK의 일본장기 강좌에서 강사를 맡고있던 나카하라 마코토는 프로그램에서 ‘이번 용왕전은 재미있어졌요. 7七계라는 수가 나와서요.’라고 평했다.

제46기 왕장전에서도 무라야마 사토시를 꺽고 하부에게 도전했지만 패배. 하지만 제55기 A급 순위전에서는 1패후 8연승으로 하부 명인에 도전권을 얻었다. 해를 넘기고 1997년의 제55기 명인전에서 타니가와는 하부를 상대로 4-2 승리를 거두며 전년도의 용왕위와 함께 양대 타이틀을 독식했으며 통산 5회 명인 획득으로 규정에 따라 영세 명인자격(제17세 명인)을 얻었다. 이튿날 아침 NHK 종합뉴스에 출연한 타니가와는 "내용이 좋지 않았다", " 아직 '타니가와 시대'를 만들지 못했다" 라고 말했다.

제10기 용왕전에서도 사나다 케이이치의 도전을 꺽고 방위에 성공, 타이틀 수에서는 하부가 앞섰지만 2개의 빅타이틀이 높게 평가되어 1997년 5번째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하고 획득상금, 대국료 랭킹도 1위를 차지했다. [각주:4]

하부세대와 대결 2

1998년 이후의 타이틀 매치는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후지이 타케시, 고다 마사타카, 마루야마 타다히사, 모리우치 토시유키 등 통칭, ‘하부세대’와의 격전이 된다.

1998년 명인위를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사토 야스미츠에게 빼앗겼다. 제6국까지 3:3으로 선수측이 이기는 전개가 반복되었는데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은 3국은 전부 특기인 각행교환을 사토가 받아치는 형태였으나 마지막 7국에서 후리고마로 선수를 잡은 타니가와는 각행교환 대신 망루 울타리를 선택했고 여기서 사토가 승리해 ‘사토 신 명인’이 탄생했다.

같은해의 11기 용왕전에서도 혁신적인 사간비차 전법 ‘후지이 시스템’으로 일본장기계를 석권한 후지이 타케시를 상대로 1국에서는 혈웅 울타리가 붕괴되고, 2국은 서로 몰이비차에서 패배, 3, 4국에서는 울타리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몰리는, 이른바 ‘통구이’ 상태로 패배하며 스트레이트로 ‘후지이 신 용왕’을 탄생시키고 자신은 무관이 되었다.

그렇다해도 1년간은 ‘전 용왕, 명인’ 직함을 자칭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본인의 의향으로 연맹은 통상의 "9단"으로 남았다.

1998년의 A급 순위전은 무라야마 사토시의 사퇴(같은해에 사망)로 인해 9인 리그전이 펼쳐졌다. 7연승으로 맞이한 최종 9전에서 시마 아키라에게 지고 이로써 시마 아키라는 A급 잔류하는 대신 제자인 이노우에 케이타가 A급에서 떨어지면서 7승 1패인 모리우치 토시유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이겨 사토 야스미츠에 대한 리턴매치의 권리는 얻었지만 ‘이노우에에게는 미안하다’ 라고 발언했다.

여기서 맞이한 사토와의 1999년도 제57기 명인전. 1, 2국을 패했지만 타니가와 특유의 각행교환이 힘을 발휘하면서 2연패후 3연승, 세트스코어 3-2로 1승만을 남겨두었다. 제6국에서 앉은비차 혈웅으로 버티는 사토 야스미츠를 상대로 2일째 심야까지 계속된 203수의 대격투끝에 난해한 국면을 놓치면서 아깝게 패배, 최종국에서도 패하면서 사상최초 ‘3번째 명인 복위’라는 진기록 달성은 무위로 돌아갔다.

직후의 제70기 기성전(1999)에서 고다 마사타카에게 기성위를 탈취하고 무관을 벗어난다. [각주:5]

2000년에는 제71기 기성전, 제41기 왕위전, 제50기 왕장전에서 전부 하부와 타이틀을 놓고 겨루었는데 특히 기성전과 왕위전은 일정이 겹치며 12번국이라고 불리는 명승부를 연출했지만 결과적으로 3대회 모두 패하며 무관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제59기 A급 순위전에서는 마지막 9차전에서 사토 야스미츠를 꺽고 마루야마 타다히사 명인에 대한 도전권을 얻었다. 이듬해의 제59기 명인전은 3년전, 사토 야스미츠와의 명인전과 똑같이 6국까지 선수가 계속 승리하다 7국째에 후수가 승리한다는 전개가 되어 마루야마가 명인위를 지켜내었다. 이 명인전에서 후수인 타니가와가 사간비차를 사용하자 마루야마는 밀레니엄 울타리를 2번 사용했고 횡보잡기 8五비 전법이 3번 나오는 등 당시의 유행을 상징하는 대국이 되었다.

2002년도 제43기 왕위전 7번국에서 타니가와는 하부를 상대로 왕위를 탈취, 2년만에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이 시리즈의 총6국(제5국은 천일수로 재경기)은 제1국부터 고키겐 중비차의 급전형, 종보잡기 아오노 신수 3六보, 망루 울타리, 각행교환 발판봉은, 맞비차, 서로 혈웅 울타리로 모두 각기 다른 전법을 사용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또 이 1국에서 공식전 통산 1000승을 기록해 해설을 맡은 기사가 "1000승으로 선승"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2003년 제44기 왕위전에서는 하부의 도전을 막고 타이틀 방어에 성공, 하부 요시하루를 상대로 동일한 타이틀매치에서 2년 연속 승리 기록은 타니가와가 처음으로 세운 기록이다. 같은해의 제29기 기왕전에서도 마루야마 타다히사를 누르고 기왕위를 획득, 1998년의 명인실관 이후 약 6년만에 2관왕이 되었다.

2003년 12월 19일, A급 순위전의 대 시마 아키라전(2003년 12월 19일)에서 각행 교환의 후수 차례에서 봉은의 은을 그냥 버리는 명수를 두었다. 시마 스스로 각행을 교환한 다음 ‘선후수 동형 각행교환’에서 53수째에 타니가와는 봉은에 의한 은 교환 대신 선수인 시마가 거부하자 7七에 있던 은을 ▲8八은으로 끌어들이는 형국에서 56수 째에 기습적인 ‘△7七은 승격’을 작렬시켰다. 여기서 ▲동계 △3八마 ▲동금 △8九비 ▲7九은 △8八비 승격 ▲동금 △7九비 승격 ▲4八옥 △8八용 ▲4七옥 △4五금으로 이으면서 단숨에 몰아붙였다. 이 ‘‘△7七은 승격’은 그해의 마쓰다 고조 상을 수상했는데, 전법도 울타리도 아닌, 특정의 수에 주어진 것으로는 첫번째 수상이다.

2004년 하부에게 왕위와 기왕위를 모두 내주며 다시 무관으로 물러났지만 2005년 제18기 용왕 랭킹전 1조 1회전에서 미우라 히로시에 패하며 본전 출장자 결정전 1회전에서도 사토 야스미츠에 패퇴해, 2조로 떨어져 이로써 용왕전 창설 이래 통산 18기 연속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5년 제64기 A급 순위전에서는 8승1패로 하부 요시하루와 함께 톱 타이를 이루고 플레이오프를 가졌는데 후수차례 1수손해 각행교환을 채용한 이 대국에서 127수째에 하부는 ▲3一각으로 타니가와를 몰아붙였지만 교묘하게 추격을 벗어나며 156수 째에 승리, 장기 대상에 신설된 "명국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11번째 명인전 도전에 나섰지만 제64기 명인전에서 모리우치의 강한 방어에 밀려 9년만의 명인복귀는 실현되지 않았다.

기풍

다른 기사들이 착상하기 어려운 시점에 바로 상대방의 옥을 노리고 외통장기를 시도한다는 데서 ‘광속의 추격’, ‘광속류’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하다. 하부 요시하루는 ‘이런 시점에 벌써 외통을 노리나"?’라고 놀란적이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스스로도 ‘광속의 다양함이 없어져 버렸다’고 농담삼아 말할 정도로 ‘광속’만을 노리지는 않는 기풍으로 변화했다. 또 유력한 수가 2개 이상 보인다면 반드시 말의 전진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타니가와 전진류"라고도 부른다. 휘호할 때는 대체로 광속, 전진, 비상, 위소유(마츠오 바쇼의 "명인 위소에 논다"에서) 등이 있다. 달필인데다가, 한눈에 타니가와가 썻다고 알 수 있는 독특한 필체를 사용한다.

타니가와의 특징으로 종반까지 이어지는 공격일변도의 날카로움을 드는데 이런 기풍을 의식하다보니 실수로 역전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몰아가기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역전이 가능한데도 그냥 지는 경우가 있다. 한예로 타니가와가 영세명인 자격을 획득한 제55기 명인전 제1국에서 하부는 72수째에 △6五飛로 용마와 금장의 양잡기를 걸었다. 공격의 거점인 용마와 수비의 핵심인 금이 동시에 걸리는 상황에서 타니가와는 거의 노타임으로 하부의 옥 근처에 ▲4一을 던졌는데 이 수로 외통은 아니지만 하부는 외통에 걸린것으로 착각해서 금을 잡으면 이길 수 있었던 것을 타니가와의 공격을 막는데 사용하면서 역전패를 당했다.

데뷔 초기에는 몰이비차 파였지만 이후 앉은비차로 바꾸었는데 저단 시절에는 초반에 난전을 벌이다가 종반에 승리하는 스타일로, 각행교환, 망루 등이 장기였고, 최근에는 횡보잡기 8五비, 서로 몰이비차, 고키겐 중비차 등  다양한 새 전법을 추구하고 있다.

에피소드

하부 요시하루가 우승, 모리우치 토시유키가 3위를 한 제7회 초등학생 명인전에서 20세에 A급 8단의 프로기사로 해설을 맡았다. 당시 하부 등은 초등학교 6학년으로 ‘앞으로 열심히 하면 프로도 기대할만하다’라고 말했다고.

처음 명인이 되었을 때, 10단 리그에서 가토 히후미 전 명인이 대국장에 먼저 입장해 상석에 앉은 일이 있었다. 타니가와는 이때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식힌 뒤 조용히 하좌에 앉았고 대국이 시작된 후 10분동안이나 첫수를 미루면서 냉정을 찾은 결과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건을 나중에 ‘장기계’에서 에둘러 비난했었는데 이것이 ‘월하의 기사’에서 그를 모델로 한 ‘다키가와 명인’이 ‘오오하라’를 상대한 명인전 제1국에서 반외전술에 휘둘리는 것을 반성하는 의미로 팔에 상처를 내는 에피소드의 모티브가 되었다.

사카다 산키치의 증손제자에 해당한다. 나이토 쿠니오, 모리야스 형제(마사유키, 히데미츠)기사, 와카마츠 마사카즈(타니가와의 스승)으로 이어지는 이 일가는 코베조라고 불리며 일본장기계에 일대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친가는 일본정토종 소속의 절이다.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의 열성팬으로 2008년 1월에는 타이거즈 연습장에 일본장기판과 말을 선물한 적이 있다. 제자인 이노우에 케이타도 마찬가지로 한신에 대한 애정에서는 제자에게 진다고 인정한 적이 있다.

타니가와 형제는 나이토 쿠니오의 지도장기에서 양면지도대국을 두었던 적이 있는데, "양쪽 모두 이긴다"라고 생각했던 나이토가 토시아키에게는 이기고 코지에게 졌다는 일화가 있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형제를 둘다 프로기사로 만들지는 않으려고 나이토 선생님과의 지도장기에서 더 우수한 쪽을 장려회에 넣으려고 했다는 말을 나이토가 들었다고 한다.

주요 기록

최연소 명인 ; 21세
용왕전 1조 통산 재직 21기. ; 역대 1위로 하부 요시하루와 동률
최연소 1200승 48세 11개월

http://ja.wikipedia.org/wiki/%E8%B0%B7%E5%B7%9D%E6%B5%A9%E5%8F%B8

  1. 명인위를 획득하면, 규정에 따라 9단이 된다. 다니카와의 최연수 9단 승단 기록은 2005년 와타나베 아키라가 깼지만 다니카와가 첫 명인위를 획득했을 때의 규정으로는 명인위를 얻은 다음해 4월 1일이 9단 승단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명인위 획득 당일을 구단 승단일로 하는 규정으로 바뀐 것, 또 용왕전의 승단 규정도 더해서 승단을 인정하는 등의 변경이 된 것을 고려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다니카와의 최연소 9단 기록이 깨진 것인지는 의견이 나뉜다 [본문으로]
  2. 이 기전과 궁합이 좋은지 통산 7회 우승을 달성했다. 지금은 사라진 기전이므로 역대 1위. [본문으로]
  3. ‘55년조’란 일본력 쇼와 55년, 즉 1980년에 프로에 데뷔한 기사들로 이중 상당수가 타이틀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기에 유명해졌다. [본문으로]
  4. 1993년 이후, 하부 요시하루 이외의 기사가 1위가 된 것은, 이 해 뿐이다 [본문으로]
  5. 이 타이틀을 얻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타이틀 1개를 따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해 여전히 제 1인자로 남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음을 시사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