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hogi/Player

사카타 산키치, 이단아의 끝보찌르기

阪田三吉 (1870.07.01~1946.07.23) 오사카 근교 마츠무라 현 사카이 쿄와 마치 출신. 구 호적으로는 坂田三吉. (읽는 방법은 같다.)

인물

천민부락 출신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천민부락, 부라쿠민이란 일본 사회에서 최하층민으로 차별받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을 말한다.) 가업인 짚신 만들기를 도우면서 장기를 배웠다. 1886년에 니혼바시의 신발 도매상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는데, 길가에서 이루어지는 장기에서 곧잘 어른을 이겨 조숙한 천재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장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부상시켜 해고당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친가로 돌아가서 가업을 도우며 내기 장기로 솜씨를 연마했고, 아마츄어 기사로써 오사카에서는 유명해졌다. 1899년 경에 세키네 긴지로와 첫대결을 벌여 참패한 이후에 프로가 되기로 했다고 하는데 양자 모두 이 대국은 내기장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기장기였다는 설도 있다. 세키네와는 1906년 4월 22일 오사카의 아미타불 연못에서 두번째 대국(세키네의 향차 뗌 접장기)을 치러 쌍방이 호각의 승부를 벌였으나 막판에 사카다가 천일수가 될 상황을 타개하고 밀어붙이다가 아깝게 졌다. 사카타가 훗날 "나를 진짜 장기 기사로 만들어 주었다"고 술회한 일전이었다. 이후에 사카다는 타도 세키네를 목표로하여 빈곤과 건강의 문제등을 극복해갔다. 또 그 재능이 후원자들에게도 알려져 1908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장기를 연재하게 되면서 생활도 안정되었고, 기술과 인격이 모두 성장해갔다. 1910년 7월에는 사카다 산키치 7단을 맹주로 하는 간사이 장기 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13년 4월에 세키네 긴지로 8단과 대국하여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은이 울고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17년에는 8단에 오르고 이듬해 세키네와 평수로 6번의 대국을 벌여 4승 2패를 거두었지만 세키네의 수제자 도이 이치타로 7단에게는 패했다.

1921년 5월 오노 고헤이 명인이 사망하자 세키네가 13세 명인을 습위했는데 여기에는 찬성했지만 1925년 게이한신 재계 유력자 80여명의 주창으로 명인으로 추대되어 "명인"을 차징한다. 그 배경에는 관동 대지진 직후의 1924년 ‘도쿄 장기계’ 재편 결과로 사카다 이외에 도이 뿐이던 8단이 기미 킨지로, 오자키 쿠마오, 곤 야스지로, 하나다 죠타로 등으로 대폭 증원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명인참칭으로 간주되어 장기계에서 추방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1937년에 장기 대성회(일본장기연맹의 전신)에 복귀했다. 동년 2월에는 교토의 난젠사에서 키무라 요시오 (당시)8단과 이른바 "난젠사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3월에는 텐류지에서 하나다 죠타로 8단과 대국해 모두 ‘후수 차례 끝보찌르기’를 비책으로 사용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복귀 후, 8단 승격으로 제 2기 명인전 도전자 결정리그에 참가해 7승 8패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후에 은퇴하고 오사카의 자택에 틀어박혀 문자 그대로의 은둔생활을 이어갔으며 종전 직후에 식당에서 급체로 사망했지만 사카타의 사망을 알리는 신문기사는 단 10행의 기사로 사진도 없었고 사망일도 3일이나 틀렸다.

1955년 일본장기연맹은 그에게 명인왕장의 칭호를 추증했고 오사카의 통천각 아래에는 ‘왕장’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인물

집이 궁핍했고 어릴적부터 견습생으로 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글을 몰랐다. 직접 장기를 사사받은 마쓰다 고조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한자는 三, 吉, 馬의 3개 뿐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장기연맹이 판매하는 부채에는 이 馬라는 글자가 사용되고 다른 기사들의 부채보다 비싸며 장기 팬들에게는 뿌리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호조 슈지 원작 "왕장"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비롯해 다양한 연극, 영화, 노래의 모델이 되었다. 사카다 본인도 생전에 "이 몸이 죽으면 반드시 연극이나 활동사진으로 해주었으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등에 나오는 사카타의 이미지는 과장된 것이어서 실제의 본인과는 차이가 크다는 증언이 많이 있다. 실제로는 지극히 예의바른 인물이었으며 (다만 실제로 만나본 기사들은 말년의 사카다만을 본 것이라 젊은 시절에도 점잖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문자는 몰라도 에도 시대의 옛 장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장기도 그의 독학은 아니고 사카타 이전에 오사카의 명인이라고 불리우던 코바야시 히가시햐쿠사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유명한 사카타류 맞비차도 에도시대의 정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승려등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일반 상식은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기행이 있었던 것은 마쓰다 고조도 인정하고 있는데, 식당의 메뉴를 읽을 수 없거나 사카타의 기록계였던 오오야마 야스하루가 기보를 기록하는 것을 보고, "영어로 기록하나"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또 사카타 본인은 글자를 못 읽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에는 장기가 한 가득 들어있지"라는 익살맞은 행동도 했다.

실제의 선생님은 정말 진솔한 분으로 색다른 면은 있었지만 솔직하고 구김살 없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사람이 장기를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담으로, 인기만화 "유리가면"의 주인공인 기타지마 마야의 모델도 사카타이다. NHK 2005년 1월24일 방영된 ‘The 순정 만화! 작자가 말하는 명작의 비밀 ; 제1화 유리가면’에서 작가인 미쿠니 렌타로가 어린시절 보았던 "왕장"에서 나오는 사카타 미요시에 자극을 받고 한가지 재주가 뛰어난데 반해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주인공을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후계자들

제자로는 사토우치 긴코, 호시다 케이조, 다카하마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사카타가 특별히 재능을 높게 평가한 마쓰다 고조가 있다. 사카다는 마쓰다가 장기를 가르치는 사교클럽에 나가서 다양한 어드바이스를 했고 "키무라 요시오를 이기는 것은 너 밖에 없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사카타가 자랑하던 몰이비차 전법은 오노 겐이치가 개량을 더해서 계승해 나갔다. 사카타를 창시한 전법중에 사카타 맞비차, 소매비차 등이 유명하고 특히 소매비차는 하나타 타로가 대응하는 정석을 만들어낼 때까지 불패의 전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사카타 본인은 그다지 제자가 많지 않아서 수제자인 후지우치 긴코는 제자 양성에 힘을 써서, 다카시마 가쓰키요, 나이토 쿠니오, 와카마츠 마사카즈를 필두로 하는 "사카다 미요시의 손제자"들로 이어져 와카마츠에게서 사사받은 "사카타 산키치의 증손제자"로 17세 명인 타니가와 코지가 있다. 사실 후지우치는 원래 기사도 뭣도 아닌 일개 섬유업자이며 사카타와는 스폰서로 이어지는 접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연습을 시켜주는 사이에 사카타의 매력에 이끌려 39세의 나이로 프로기사가 된 인물이다.

에피소드

난젠사의 결전

사카타의 복귀를 기념해, 요미우리 신문사주최로 특별 대국을 주선하는 가운데 당시의 명인인 세키네 긴지로가 대상이었지만 그의 고령때문에 제자인 키무라 요시오가 사카타 산키치와 대국에 임하게 되었다.

대국의 무대는 교토 난젠사로, 1937년 2월 5일부터 7일간, 제한시간 30시간이라는 룰로 행해졌는데, 현재의 공식전에서 제한시간이 가장 긴 명인전도 9시간인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기나긴 제한시간이었다.(상설 초기의 명인전이라고 해도 제한시간 15시간이었다.) 이 때 이미 66세의 고령이던 사카타에게는 험난한 싸움이 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이 대국에서 후수가된 사카타가 2번째 수에 놀랍게도 9四보를 낸 것이 대단히 유명해졌다. 후수이면서도 그것에서 한번 더 수를 손해보는 것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끝보찌르기는 간사이 바둑계를 떠맡고 있던 사카타가 보여준 도쿄에 대한 반골정신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당시에는 매우 주목을 끈 승부로, 신문에서 이 끝보찌르기를 알게 된 작가 오다 사쿠노스케는 대단히 감격해서 "사카다가 했구나, 했어."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고 작품 "청우"에서 회상하고 있다.[각주:1]

처음부터 끝보(반상에서 가장자리의 보)를 찌르는 것은 당시의 일본장기 상식으로는 프로기사가 둘만한 수가 아니었다. 장기가 서툰 일반인에게나 있을 법한 수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울타리의 구축에 적합치 않은 등의 문제로, 일반적인 전법은 아니지만 후지이 시스템 등에서는 정석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 효용으로는 왕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던지 몇가지가 있지만 지금도 사카타가 끝보를 찌른 것이 어느 정도까지 의미가 있는 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대국의 결과는 95수로 선수인 기무라 요시오가 승리했다. 후일 사카다의 손자 제자에 해당하는 나이토 쿠니오는 자신의 저서 사카타 산키치 명국집에서 이 난젠사의 결전을 310년 장기의 역사중에서 최고의 승부라고 적은 바 있다. 한편, 요미우리 신문사의 관전기자였던 사이죠 코이치에 의하면 당시는 세키네 긴지로가 명인위를 반납하여 기무라 등이 주축인 제 1기 명인결정리그전이 한창이었다. 당시의 명인전은 도쿄의 니치니치 신문(현재의 마이니치 신문)이 주최하고 있었는데, 작은 신문사인 요미우리는 명인의 권위를 이용하여 리그전의 상위에서 명인위 획득이 유력시 되던 키무라 요시오와 하나다 타로라는 2명의 실력자와 사카타를 대국시키려 하고 있었다고 한다. 명인위의 실추를 걱정한 마이니치는 반말하였으나 기무라가 "장기대성회(일본장기연맹의 전신)를 탈퇴하여 개인으로라도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국이 실현되었다고 한다.

하나다 죠타로와의 대국(1937년 3월)은 천류사의 결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후수가 된 사카타는 2번째 수에 이번에는 1四보로, 난젠사와는 반대쪽의 끝보를 찌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169수 하나다의 승리가 되었다.

이 1수의 특이함이 월하의 기사에서는 중요한 모티브를 이루고 있고, 미카미 산키치의 모델이 되었다.

사카타 산키치의 아내

희곡 ‘왕장’에서 나오는 사카타의 아내는 이름이 "코하루"이지만 실제로는 사카타 코유우다. 슬하에 삼남삼녀를 두었고 자녀들의 증언으로는 코유우는 사카타가 오랫동안 연모했던 여성으로 코유우가 번번히 청혼을 거절하다가 나중에야 시집갔다고 한다. 코유우는 궁핍함을 참으면서 남편을 계속 지지했다. 극중의 철도자살미수는 실제의 사건이라고 하며 1913년에 있었던 일로 추정되는데, 사카타는 이 때 처음으로 가족의 중요함을 깨달아 그 후의 삶에 큰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오랜 동안의 고생과 남편을 간호하는 중 코유우 자신이 병으로 쓰러졌다. 임종에 직면했을때, "애 아빠. 당신은 장기가 생명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리석은 장기를 두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산키치에게 말했다고 한다. 산키치는 코유우의 시신을 언제까지는 끌어안고 있었다고 한다.[각주:2]

에피소드

고향인 마츠무라에서 부라쿠민 해방운동가가 나와 1939년의 제2기 명인전 리그 2년차 대국(상대는 하나다 죠타로)에서는 같은 해방운동가 마츠모토 지이치로에게 입회를 요청하고 후반전에서 승리했다. 이때 사카타가 마츠모토에게 선물한 기념 장기판과 ‘말’이라고 적힌 장기판은 마츠무라 인권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랜 후원자 중에 모피상 이에무라 키사부로와는 부라쿠민 시절부터의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양식을 좋아해서 특히 쇠고기를 좋아했고, 식당에서도 소고기 요리를 자주 주문했다. "소고기를 먹어야 든든하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문자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식당의 메뉴를 읽지 않고 테이블을 둘러보면서 "이것은 맛있는가"라고 묻거나 "여기서 가장 맛있는 요리가 무엇인가. 소고기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언제나 요리는 두명분을 주문해서 "웨이터. 이것은 자네 것이다"라면서 감사를 나타내었다.

몸가짐에서 신경 쓰는 멋쟁이로 일본전통옷을 고집했다. 가정에서도 밖에서도 하카마 차림으로 벗을 때 보이는 옷의 안감까지도 신경써서 먹으로 ‘馬’와 ‘三’을 써놓았다. ‘승부사는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비춰져서는 안된다.’라는 신념으로 나이들어서도 백발이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손톱도 정성껏 손질했다.

인사가 매우 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그를 만났던 사람은 ‘사카타 씨가 인사를 했는데 자신은 이정도면… 하고 생각해서 고개를 들어봤더니 상대는 아직도 인사를 하고 있어서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고 증언한 경우가 있다.

돈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성격으로, 있는 돈은 다 써버리거나 남에게 줘 버렸다. 그러면서 아직 어린 기사들을 원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신참이던 시절의 오오야마 야스하루도 사카타에게 용돈을 받았던 것을 잊지 못했는데, ‘기보 정리하는 일을 하면 사사료를 다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였지만 사카타만은 대금과는 별도로 돈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대국관에 대해서는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나니와구랑 북구의 화재가 다 보이지 않겠는가. 나는 오층탑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오사카의 화재는 모두 보인다. 바로 그 차이다.’라고 말했다.

http://ja.wikipedia.org/wiki/%E9%98%AA%E7%94%B0%E4%B8%89%E5%90%89

  1. 오다 사쿠노스케는 사카타의 팬으로 작품에서 두번 그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2.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맛의 달인에서 등장하는 우미하라 유우잔과 그의 아내의 관계가 연상되는 부분도 있다. 단, 우미하라의 모티브는 로산진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