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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컨셉시온 호와 윌리엄 핍스

1641년 9월 28일, 쿠바의 하바나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스파냐 선단이 있었다.

선단을 책임지는 인물은 후앙 루이스 데 빌라 빈센치오 였고, 그의 기함인 컨셉시온 호는 600톤 급 갤리온이었다.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한번 귀환했던 이 선단은 불과 열흘만에 수리를 마치고 유럽을 향해 재 출항에 나섰다.

신대륙의 귀금속을 대서양을 횡단하는 이 항로는 에스파냐 제국의 목숨과도 같은 자금줄이었고, 멕시코와 포토시의 광산에서 채굴한 수톤의 은과 마닐라 갈레온 선단이 멀리 아시아에서 실어온 비단, 향신료, 도자기, 옥 장신구를 비롯한 에스파냐 왕실의 금은보화는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 디에고 데 파셰코의 개인보물들, 신대륙 상인들의 상납금을 포함한 막대한 보물들로 배는 화물이 과적된 상태였지만 긴 항해가 무사히 이루어도록 바람이 일정하고 폭풍이 불지않는 날들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준비가 불완전하더라도 출발해야만 했다.

컨셉시온 호

그러나 너무 늦게 허리케인 시즌이 다되어 출항한 보물선단은 폭풍에 시달려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컨셉션호는 선체에 들어온 물을 퍼내며 응급수리를 시도했지만 결국 파손이 너무 심해서 히스파니올라(오늘날의 쿠바) 북부에서 암초에 좌초되어 도미니카 근처에 좌초했다.

300명에 달하는 컨셉션 호의 선원들은 기아와 상어들에 시달리다 대부분이 사망했고 극소수만이 천신만고 끝에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여 잃어버린 보물선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남겼다.

그로부터 10년후...

메인주의 울위치에 거주하는 한 가난한 식민지 개척자 핍스는 1651년 태어난 26번째 아이에게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가 다른 14남매중의 막내로 양을 치내며 자란 윌리엄 핍스는 18살에 메인 항구에서 4년간 배 목수일로 일하다가 보스톤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쉽스콧에 조선소를 건설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살아온 그의 인생에도 순풍만범의 시절이 이어질 듯 했지만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조선소는 파괴되었고 핍스는 건조중인 배들도 모두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치는 운명에 처했다.

무일푼이 된 윌리엄 핍스는 닥치는 데로 일을 해나가며 근근히 생활하던 중 전설속의 보물선 컨셉션 호의 이야기를 듣고 보물선 탐사에 나섰섰다.

무려 7년 동안 바다를 뒤진 끝에 그는 마침내 바하마 제도 근처에서 컨셉션 호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4명의 선원들과 2~3월의 겨울 바다속을 뒤지며 59일동안 잠수를 거듭한 끝에 은괴 32톤, 금괴 11kg과 수많은 보물들을 건져내어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30만 파운드 상당의 보물을 인양해내었다.

이런 대박을 터트린 그는 영국 본국에 초대되어 6월초에 런던에 입항했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영국 국왕 제임스 2세는 그를 윈저궁에 초대했으며 기사 작위를 내리고 상금 1만 1천파운드를 내렸으며 제임스 2세와 선원들의 몫을 제외한 19만 파운드는 자금을 제공한 후원자들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차등지급되어 최고 배당율은 무려 1만%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윌리엄 핍스

가난한 식민지 양치기 출신인 윌리엄 핍스가 메사츄세스 주지사가 되어 일약 소년들의 우상이 된 것이다.

결론

인생은 한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