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Ship and Sail

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버 근처까지 접근한 드레이크는 그 지역에서 해안선이 북동방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북서방향으로만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탐험을 중지한 다음, 진로를 바꾸어 남하해서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근처를 "뉴 알비온"이라고 명명한다. 이후에 추적함대를 피해 태평양 횡단을 횡단, 서쪽으로 지구를 일주하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으로 귀환 거국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몰루카 제도를 거쳐 귀환한 드레이크는 이로써 마젤란에 이어 역사상 두번째로 세계일주를 달성했으며 그가 가져온 보물은 약 30만 파운드 이상으로 당시 잉글랜드의 연수입보다도 많았다.

드레이크의 탐험으로 아니안 해협의 실체는 더더욱 불분명해졌지만 그의 해적활동으로 얻은 이익은 실망감을 상쇄하고도 남았으며 위험으로 가득한 모험항해보다 손쉬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잉글랜드에서 북방항로 탐사의 열의는 서서히 식어갔다.

북서항로를 찾아서

러시아의 세미욘 데지노프는 1648년에 동시베리아의 콜리마 강 하구에서 북극해를 거쳐 캄차카 반도 동쪾으로 향하는 항해를 통해 알래스카와 유라시아가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 기록은 19세기 후반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762년 영국의 무역선 옥타비우스(Octavius)호는 서쪽에서 북서항로를 통과하기 위해 베링해협을 통과했으나 실종되었고 13년뒤인 1775년, 그린란드 근해에서 포경선 헤럴드 호(Herald)가 표류중이던 옥타비우스 호를 발견하여 갑판밑에서 얼어죽은 선원들의 시신을 발견하여 서양선박으로서는 최초로 북서항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했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들은 있었짐나 여전히 북방항로는 오리무중이었다.

남미 전역을 장악하고 마닐라와 태평양을 횡단하는 선단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스페인은 18세기 후반에 멕시코를 거점으로 이따금씩 북서항로 발견을 위해 북미대륙 서해안을 탐험했다. 1775년부터 1779년까지 후안 프란시스코 데 보데가 이 콰드라(Juan Francisco de la Bodega y Quadra)는 서해안을 탐사해 상세한 조사를 실시했고 그의 자료는 나중에 제임스 쿡이 북미 서해안을 탐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1791년에는 알레산드로 마라스피나(Alessandro Malaspina)가 알래스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항로의 입구로 소문이 나있는 야쿠타트 만(Yakutat Bay)에 이르렀고, 1790년에 프란시스코 데 에리사(Francisco de Eliza) 도 북서항로의 입구로 알려져 있던 후안 데 후카 해협을 항해하고 조지아 해협을 발견하였으나 북서항로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