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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gi/Strategy

사간비차의 역사 1

1. 에도시대, 일본장기의 여명.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장기 기보는 1세명인 소케이와 산사의 대국으로, 여기서 사용된 것은 사간비차 대 오른쪽 사간비차였다. 에도시대 일본장기의 주류는 앉은비차 대 몰이비차로 서로 앉은비차 계통의 장기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몰이비차를 사용하는 시대였다. 어느쪽이건 비차를 이동시키는 장기가 대부분으로 앉은비차 전법과 비슷하게 진행하다가도 비차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어째서 몰이비차가 기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인된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해보면 당시 몰이비차 울타리는 빠른 울타리가 기본이었고, 아마노 소호 의 시대인 에도 말기에 이르러서야 미노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정석 개념이 없고 선인들이 사용한 기보를 조금씩 개량해서 정석으로 삼다보니 정석에 관련된 서적도 다소 간행되었어도 실전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느리더라도 조금씩 몰이비차에 대한 앉은비차 측의 공격법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에도 초기에 앉은비차 파는 각길을 막고 ▲6七은 ▲5七은으로 은 둘을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각주:1] 빠른 찌르기 전법의 원형에 해당하는 ▲7九은이 에도 말기에 아마노 소호에 의해서 고안되었고 그 외에도 오른쪽 은, 정면비차, ▲3七계 등이 포진으로 사용되면서 망루 울타리도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일본장기는 조금씩 발전했지만 2차대전 후의 오오야마-마스다 시대까지는 대세는 사간비차에서 정면비차로 옮겨졌던 듯 하다.

2. 오오야마-마스다 시대

오오야마-마스다 시대(1950-1970) 를 말하려면 먼저 오노 겐이치(1912-1979)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오야마 야스하루(1923-1992), 마쓰다 고조(1918~1991)와 사제지간인 오노는 삼간비차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몰이비차의 다루기가 훌륭해서 A급 순위전에서도 몰이비차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정석에 관해서도 오노도 연구를 거듭하면서 △4三각형, △4三은형, 미노 울타리의 끝보를 전진시키지 않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말, 오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마스다가 진비차(삼간비차, 정면비차)로 전향했고, 마스다에게 자극을 받은 오오야마는 사간비차의 몰이비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사간비차는 5열 선점에 약해 불리한 전법으로 인식되어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만 향차를 올리는 새로운 수법이 발견되어 사간비차도 충분히 할만한 전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오오야마는 사간비차를 계속 연구하여 대 5열 선점 포진을 계속 강화시켜 불패의 몰이비차라고 까지 불렸고, 제1차 몰이비차 붐이 일어났다. 역사에 남을 첫 사간비차 붐의 도래로 몰이비차 채용율은 4할을 넘었고 그 대부분이 사간비차를 기본으로 하는 상황에서 오오야마는 완전한 몰이비차 파가 되었다.

이 때문에 사간의 오오야마, 정면의 마스다, 삼간의 오노, 중비차의 마츠다 [각주:2] 로 불리우며 몰이비차의 첫 융성기를 구가하던 이 시대에 야마다 미찌요시라는 기사가 도전장을 내면서 근대 사간비차의 역사는 급변하게 된다.

3. 역사를 만든 남자, 야마다 미치요시(1933-1970).

그가 없었다면 사간비차의 역사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고 정석의 진보는 적어도 10년은 늦었으리라고들 한다. 그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완수해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야마다 미치요시의 실적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찬란히 빛나고 있다. 야마다는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23세쯤 부터 잡지에 장기관련 글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첫연재가 "몰이비차의 재인식"이었다.

원래 이 연재는 오노의 삼간비차를 기본으로 했지만 연재가 끝나갈 무렵에 오오야마가 사간비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년후 야마다는 다시 펜을 들어 "속-몰이비차의 재인식"을 저술하면서 사간비차 대책을 표적으로 한 연구를 신문지면상에서 계속 발표했다. 이후에도 "사간비차 신대책의 공론", "사간비차의 연구"등으로 이어지는 명연구를 발표하여 일본장기계에 상당한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는데, 당시에 장기의 연구는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으로 성과는 자신의 비밀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정직하게 발표하는 것은 유리하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도록 충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야마다의 파격적인 연재에 의하여 사간비차 대책은 비약적인 진부를 이루어, 연구하는 기사라는 풍조가 일본장기계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또, 야마다는 이른바 "야마다 교실"이라는 연구회를 시작하여 젊은 기사들과 연구의 내용을 공유하면서 비약적으로 정석을 가다듬어나갔다.

야마다의 연재이전까지 사간비차 대책은 우선 에도시대부터 전해져온 ▲2六비, ▲3七계, ▲4六은에서 ▲3五보를 노려나가는 전법과 5열 선점으로 ▲4五보를 전진시키는 방법의 두가지가 유력했고 그 외에는 막연히 각길을 세우고 지구전을 시도하는 정도였다. 여기서 첫번째는 몰이차 측이 대응 정석을 발견해서 사라지게 되었고, 두번째 것에는 향차를 올리는 완승책이 발견되어 이길 수 없게 되었으며 세번째에도 당연히 쉽게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각각의 기사는 새로운 전법을 고안해야 했고 그러한 연구를 모아서 야마다는 연구를 거듭했다.

그 연구의 성과로 처음 나온것이 현재 말하고 있는 오른쪽 은과 봉은 전법으로, 당시에는 전법의 명칭이 없어서 야마다는 ▲4六은대책, ▲3七은대책 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현대적인 급전책의 싹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야마다는 오른쪽 은 전법을 주력 전법이라고 보았고 봉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감각으로 볼때, 정석적인 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으며 "봉은에는 사간비차라고 하고, 봉은의 수비책으로는 사간비차가 있으므로 ... 일견 모순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오오야마는 "은이 (원하는 방향과) 다른 쪽으로 가는 느낌이라서 두기 힘든 수"라고 평했는데, 가토 히후미 (1940-)는 "하나의 전법이지만, 후수가 형태를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효과가 없다."고 발언해서 봉은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각주:3]

이후 1960년대에는 단순한 급전만으로는 유리하게 싸울 수 없다는 것이 기본이 되어 위치 선점 지구전이 시작되고 5열 선점과 연관되어 ▲6五보 교환 지구전, 옥두 자릿수 지정, 그리고 6열 자릿수 지정 등이 이루어졌으며 현재에는 야마다 정석이라 불리는 ▲5七은 왼쪽에서 ▲3五보 △동보 ▲4六은으로 이어지는 전법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현재와 달리 ▲5七은 오른쪽이 상식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 사간비차 정석의 여명을 야마다는 계속 정비하다가 1970년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버린다.

4. 오오야마-마스다 시대의 쇠퇴

오오야마는 사간비차를 축으로 장기계에 계속 군림했으나 그 아성을 무너트리는 것이 나카하라 마코토(1947-)였다. A급 채류 2기째에 전승으로 명인전 도전을 결정짓고 오오야마를 꺾은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명인위에 올랐고, 나중에는 몰이비차도 사용하는 나카하라는 당시에는 앉은비차만 사용하고 있었다. 나카하라가 특히 대 몰이비차 전법으로 사용한 것이 것은 봉은과 5열 선점으로, 특히 5열 선점이 교묘했다.

한편, 모리야스 히데미츠(1949-1993)가 장기계에 등장하여 [각주:4] 그와 오오야마를 중심으로 사간비차 전법은 아직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전법은 옥두 선점 전법이 활발해서 그 대항책으로 거비차 혈웅이 시작되었으며 미노 울타리의 견고함이 주목받으면서 비슷한 수준의 견고함을 가진 왼쪽 미노가 이따금 등장하기 시작한다.

5. 사간비차의 겨울

1970년대 후반에 몰이비차의 역사에 남을 최대사건인 앉은비차혈웅이 등장했다. 앉은비차혈웅 그 자체는 망루 울타리에서 사용되거나 마스다가 사용했었지만 흉내내는 기사가 없어서 기습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이 시대에 부활한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미야타 토시오(1952-)가 텔레비전 등에서 사용했고 전시대의 사람들 처럼 기습적인 전법으로 시간이 짧은 기전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순위전의 역전패를 계기로 그만두었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이 전법의 우수함을 깨달은 기사가 프로기사가 되었으니 그가 타나카 토라히코(1957-)였다.

타나카는 이 전법을 본격적인 전법으로 주목해서 높은 승률을 올렸고, 말이 지나치게 편중된다는 단점이 지적되어 초기에는 경멸되었지만 독특한 초반감각으로 타나카가 계속 승리를 쌓으며 마침내 승률 1위에 도달하게 되자 서서히 전법이 채용되었고, 지구전 중시의 경향과 맞물리면서 짜기 쉽고 견고하다는 장점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자 기존의 위치 선점 싸움에서 서서히 주류의 전법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더해 왼쪽 미노가 증가하자 급전은 일부에서 밖에 사용되지 않았고 앉은비차는 앉은비차혈웅과 왼쪽 미노를 2대 전법으로 활용했다.

그리자 몰이비차는 앉은비차 혈웅에게 계속 패배를 당했다. 대항책도 연구되었지만 상대 진형의 견고함과 전장에서 멀다는 이점 앞에서 계속 패했고, 너무나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자 많은 몰이비차 기사들이 앉은차로 전향해 버렸다.

오오야마, 모리야스 두 명은 계속 몰이비차를 사용했지만 이에 대응할 좋은 대항책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몰이비차 파는 긴 암흑기를 걷게 된다.

6. 사기노미야 정석

1980년대 전반, 몰이비차가 쇠퇴하던 시대에 새로운 정석이 태어난다. 야마다 정석은 그 자체가 완성된 아름다운 정석이지만 △5四보, △6四보 양쪽을 모두 전진시킨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숙제가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론적인 급전파인 아오노 테루이치(1953~)는 종래 몰이비차가 좋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3八비의 변화에 새로운 연구를 더하여 앉은비차에게 유리한 전법을 찾아내었고 이것을 사기노미야 정석이라고 불렀다. [각주:5]

이 정석의 완성으로 앉은비차 급전 정석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즉, 몰이비차 측에서 △3二은형으로 지구전을 걸 수 없었으므로, 사간비차의 역사에 남는 획기적인 발견이 되어 이미 앉은비차혈웅의 일본장기계 석권으로 급전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결정타가 되어 몰이비차는 격감해 버리며 이것이 역설적으로 사기노미야 정석이 줄어드는 상황을 만들었다.

7. 사간비차의 부활

앉은비차 혈웅이 일본장기계를 석권한 지 10년. 몰이비차에게는 혹독하던 시절에 고바야시 켄지(1957~)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원래 고바야시는 앉은비차 파였지만 몰이비차의 쇠퇴로 급전의 정석이 사라져 가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A급에서 떨어지자, 사간비차 파로 전입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앉은비차혈웅을 계속 이기고 이겨서 마침내 A급에 복귀했다. 이로써 고바야시의 활약에 의하여 그때까지 정석에서 경시되던 몰이비차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인식되었다.

고바야시는 왼쪽 미노와 앉은비차 혈웅의 양대전법을 차례차례 꺽어갔고 벼랑끝에 몰이비차파에 수퍼 사간비차라는 복음을 전해나갔다. 그의 전법 연구는 앉은비차 감각의 몰이비차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고 지구전 책에 더해 급전이 재검토되어 조금씩 시도되었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사간비차의 △4三은 △5二 금형에서 나오는 급전책에 신대책 △동각이 나타난 것 때문으로, 수순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사용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급전을 받아들이는 의미로서는 유력한 전법으로 평가되었고, 당시까지는 간단하게 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형태를 결국 깨지 못했다.이에 왼쪽 은의 정석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는 경시되었전 급전 정석의 대부분이 △3二은의 형태를 격파하기 위한 정석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앉은비차 혈웅을 상대로는 다양한 대책이 시도되고 있었다. △5四은 형태를 축으로해서 △4四은, 단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는 사간비차, 지하철 비차, 정면비차 등등의 연구로 앉은비차 혈웅의 승률은 다소 하락했으며 대 왼쪽 미노의 정석은 꽤 정리되어 빠르게 옥두를 노리는 것이 공략의 기본이라는 것은 널리 인식되었으나 여전히 앉은비차 혈웅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www.geocities.co.jp/CollegeLife-Labo/4499/shogi/chronicle.html

  1. 안목 전법과 비슷한 유형 [본문으로]
  2. 쓰노 중비차의 창시자인 마츠다 시게유키(1921-1988)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3. 하지만 가토는 이 발언 이후 5년이 지나지 않아서 봉은을 주력 전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4. 끈질긴 기풍으로 오뚝이류라고도 불린 모리야스는 사간비차로 A급에 도달했고 1984년에는 명인 타니가와에게도 도전한 적이 있다. [본문으로]
  5. 이 전법을 타이틀전에 사용해서 이긴 요네나가 쿠니오(1943~)와 아오노가 모두 사기노미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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