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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History of Battleship, 전함의 역사

USS Iowa

전함(The battleship)은 대구경포와 두터운 장갑으로 보호되는 포함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전함은 동급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와 장갑을 경쟁적으로 강화시키면서 발전되었다. 군비경쟁중인 국가들 중 하나가 사정거리가 더 길고, 대형화된 대포를 장비한 군함을 만들면 반대쪽에서는 더 강력한 장갑을 장비하는 식으로 경쟁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발전에는 국가의 공업력이 집약되었다. 전함들은 국력의 상징이었으며 20세기 초, 대함거포주의 시대에 이르러 전함의 보유는 국가위신의 상징으로, 오늘날의 핵무기들 처럼 전략무기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전함이 없는 나라는 다른 나라의 해상작전을 방해할 수 없었기에 주요 군사국가로 취급되지 않았고 가장 강력한 전함을 보유한 나라(대체로 영국)는 자국의 위상과 강대한 권력을 자랑스러워했다.

전함은 전통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적함을 상대하거나, 상륙작전의 지원을 위해서 해안을 포격하는 임무를 수행했었지만, 2차대전과 함께 항공모함에게 함대 주력의 자리를 많이 내어주었고 대공포를 대량으로 장비해서 항공모함을 다른 수상함에게서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전함들은 미사일을 발사 플랫폼이나 해안 포격용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주로 기념함이나 박물관으로 잔존하고 있다.

범선시대

HMS Victory(1884)

먼 선조격으로는 북유럽에서 사용되던, 궁수들을 위한 높은 망루가 있었던 범선인 코그(cog) 선이 있지만 이후에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발전한 갤리온 정도가 되면 당시대의 전함, 매노워(Man-o-War)라 불릴만한 수준이 된다.  갤리온들은 지중해를 주름잡는 해양국가 에스파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카락에서 항해성이 향상된 본격적 대형 전함으로 후발주자였던 영국은 에스파냐의 갤리온을 능가하기 위해 보다 쾌속화된, race-built galleon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갤리온들은 에스파냐의 갤리온보다 선수루와 선미루가 낮아서 보다 안정적이었으며 조종성이 향상되었다.

에스파냐의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북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인들은 대형군함들을 계속해서 건조했고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압도적인 해군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영국해군 은 2~3위국 군함의 총합보다 많은 양의 전함을 보유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만약 이런 우위에 도전하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은 다른 국가와 연합하여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등, 해양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영국을 이렇게 강력한 해군국으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매노워(Man'o War)와 전열전술이었다. 예전의 해전이란 배와 배의 1:1 대결을 대형화 한 것에 불과했었는데 영국해군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서 배가 가장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면서 자신들의 가장 약한 부위를 서로 보호할 수 있도록 배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서게게 했고 이 전법의 우수성은 유럽의 각 해양국가들이 인정하여 이후 전열전술은 해군의 표준적인 전술이 되었다.

코펜하겐 해전 1801

영국해군의 철의 규율은 이 전열을 절대로 흐트러트리지 못하게 했으며 유일하게 전열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침몰 직전까지 피해를 입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가혹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배가 강력한 화력을 가진 대형함이어야 했기 때문에 영국해군은 배에 1급부터 5급까지 등급을 붙였다.
1~4급은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라고 불리웠고, 그 이하 등급의 군함들은 전열전술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서, 공익이나 면제 판정을 받았... 던 것은 아니고 프리깃이나 슬루프로 분류되어서 연락이나 정찰 임무를 맡았다. 1850년대에 중앙부에 함포를 배치한 포탑함들이 등장할때까지 이들은 바다의 왕자였다.

산업력과 군사력의 결합

산업시대의 여명기에 전함의 개념에 몇가지 기술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신뢰할만한 증기기관이 제조되어 군함들의 조종이 보다 수월해졌고 석탄만 보급된다면 복잡하게 풍향과 향로 계산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곳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해군제독 헨리 조셉 파이잔은 함포에서 지연신관을 이용한 폭발탄을 발명했으며 이 신형 포탄은 나무 선체를 뚫고 들어간 다음에 내부에서 폭발하여 더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1841년에 이것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미국 해군이 채용했고 1859년의 크림 전쟁에서 목조선들의 시대가 끝나고 철갑함을 만들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860년대에 주요 해군국들은 장갑 순양함들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1876년에 프랑스는 장갑전함 Redoutable 호를 진수하게 됩니다.

증기선 전함들

Napoleon 1850

1840년대 이전에 증기선들을 추진력으로 양 옆에 물레방아 같은 커다란 페달을 붙여서 추진력을 얻었는데 전함들은 양쪽에 대포들을 장비해야 했기 때문에 화력이 너무 제한되는 관계로 군함의 증기동력화는 의외로 늦어지게 되었다. 40년대 이후에 기술의 발달로 프로펠러를 추진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야 본격적인 증기 전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850년 진수된 프랑스 해군의 Le Napoleon 호는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 전함이었으며 영국은 이에 뒤질세라 1849년에 HMS Agamemnon호를 주문했고 1853년에 진수함으로써 본격적인 증기선 전함의 시대가 열렸다.(그와 함께 새로운 영-프간의 전함군비경쟁시대가 열렸다.) 프랑스는 Le Napoleon 호에 만족해서 8대나 자매함을 10년에 걸쳐서 건조해서 영국의 해군력을 따라잡고자 노력했으며 이후로도 프랑스는 10척의 새로운 목조 증기 전함을 건조하고 28척의 구형 전함을 증기 기관추진형으로 개장했지만 영국은 18대의 신조 전함과 41척의 전함을 개장해서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 두 나라만이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러시아나 터키, 스웨덴, 나폴리, 덴마크,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은 영국의 기술지원으로 소수의 증기목조전함들만을 건조하거나 개장했을 뿐이었다.

철갑함(ironclad)

LaGloire

영국의 해상우위에 프랑스는 1859년 최초의 철갑함 La Gloire호를 진수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다. 원래 이 배는 중량을 감소하기 위해 개발된 단일포열의 전열함으로 개발되었지만 외부 장갑에 철판을 덧씌워서 방어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 좋은 효과를 거두면서 당시의 전함들이 발사하는 포탄을 가볍게 튕겨낼 수 있었던 이 배는 곧 모든 영국 전함들은 고물로 만들어 버렸다. 영국도 이에 뒤질세라 즉시 군비경쟁 모드에 돌입하였고 완전철갑함인 HMS Warrior 호를 1860년에 건조하였고 불과 10년만에 모든 목조 전함들은 철판을 덧씌워서라도 철갑함으로 개장되었다.

영국해군에 도전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프러시아가 이 건함경쟁에 뛰어들었고 영국해군은 군함 기술 개발에 더욱 더 열을 올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럽이 세계에서 획득한 부가 군비경쟁에 쏟아지게 된 것이다.

포탑과 장포신

이윽고, 스웨덴의 요한 에릭슨과 영국의 발명가 코퍼 콜스 대령이 연구한, 포탑을 장비한 전함이 각국의 설계사들에 의하여 건조되기 시작했다. 포탑이 있는 배들은 포를 양쪽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큰 함포를 장비할 수 있게 되었고 즐비하게 늘어서있던 전통적인 목조군함의 모습이 변형되어 함포의 대형화가 시작된 것이다.

1870년대 부터는 함포의 장포신화가 연구되었다. 예전에 사용되던 흑색 화약은 빠르게 연소되기 때문에 포신이 짧아야 했으나 화약에 몇가지 개량이 이루어졌고 폭발에 의한 연소의 통제가 발전하면서 갈색 화약, 흑색 화약들이 만들어지면서 포신이 긴 대포가 만들어지고,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대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연화약의 발명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함포 발사시의 연기가 줄어들어서 포격중에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됐다.

1865년부터 1906년대는 군함의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로 건함경쟁은 날로 심각해져서 영국 정부는 해마다 GNP의 0.2%에 해당하는 175만 파운드를 건함에 쏟아부었다.

강철 군함의 시대

LeDougtable(1876)

프랑스는 지멘스 공법을 이용해서 대량으로 강철을 생산하기 시작한 최초의 국가로 1876년 최초의 강철구조물 전함인 Redoutable호를 진수했다. 

철에 비교할때, 강철은 비교적 경량으로 보다 견고한 구조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아직 제철기술이 불완전해서 선체 전체를 강철로 감싸지는 못했으며 완전한 강철 전함은 나중에 베세마 철강법을 이용해서 강철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되면서 가격이 하락해야 했다. 덕분에 영국해군은 1875년과 1876년에 완전 강철 구조의 군함 HMS Iris와 Mercury를 건조했다.

디자인상의 실험들

USS Monterey 1896

1870년부터 1890년까지 각국은 다양한 전함들을 건조하면서 자신들의 방식을 찾아 나갔다. 전통적인 방법대로 설계되던 범선시대에 비해서 철제 증기추진 전함들은 어떤 방향이 가장 적합한 모양인지가 모호했었기에 주요해군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오만가지 전함들이 실험적으로 설계되었다. 6000톤 범위내에서 세계 주요강대국들은 다양한 전함들을 설계하였고 독일의 장갑포탑함들이나 연안용 포탑함인 모니터 함들이 이 시기에 나름대로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잡았다.

이런 일련의 실험들을 통해서 점차 디자인이 확립되었고 영국해군이 1870년에 건조한 Devastation클래스는 최초의 근대전함, pre-dreadnought의 효시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USS Monitor와 CSS Virginia가 버지니아의 햄튼 수로에서 최초의 장갑함 간의 해전을 벌인 뒤에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함의 디자인은 통합되었으며 장갑-화력-속도의 균형이 잡혀가면서 1905년까지 세계 각국은 다양한 군함들을 설계하지만, 이 중에서 배수량 9,000~16,000톤에 증기기관으로 13~18노트의 속도를 내고 4문 이상의 12인치 대형 포탑을 장비하면서 8개 정도의 8인치 부포와, 더 작은 포들을 주렁주렁 달고있는 녀석들을 pre-dreadnought라고 부르게 된다.[각주:1]

전거포함(All-Big gun Ship)

미카사

1905년 러일전쟁의 하일라이트인 쓰시마 해전에서 5척의 프랑스제 보로디노 타입 전함들을 제외하고는 성능, 디자인이 모두 제각각인 군함들로 구성된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영국제 전함들로 구성된 일본해군에게 기록적인 대패배를 당했다.1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해군이 대규모 결전을 벌인 이 해전은 이후의 해군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전훈을 조사한 결과 근대해전의 중요한 원칙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 무선장치의 발달로 함교에서 사격통제를 하게 되었으므로 주요화포들의 구경과 제원이 통일되는 것이 유리하다.
- 함포사격은 보다 원거리에서 이루어진다.
- 부포의 화력은 주포에 비해서 활용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소형 화포를 주렁주렁 달고있는것보다 통일된 대구경포를 탑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이리하여 단일거포함이 영국, 미국, 일본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일본해군은 최초의 단일거포함을 개발하려했고 야심차게 당대 최대의 거함, 쓰시마 호를 단일거포함으로 전부 12인치포를 장비하려했지만 예산부족과 기술부족으로 이도저도아닌 중구경포들만 줄줄이 장비한 배가 되었다.

미 해군도 단일거포함으로 드레드노트와 같은 수준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급을 개발하고 있었습지만 개발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고, 드레드노트 보다 나중에 보다 소형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드레드노트

HMS Dreadnought

영국의 로열 네이비는, 제1 해군경(해군 참모총장..?)인 젝키 피셔 제독이 야심차게 추진한 계획에 의하여 불과 11개월만에 HMS Dreadnought를 진수하였다. 드레드노트는 10문의 12인치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혁명적인 증기터빈으로 추진되어 최고 21노트를 낼 수 있는 고속+화력을 겸비한 전함으로 이 혁명적인 배의 등장으로 완전 거포함의 시대가 열렸으며 이전의 모든 전함들은 전부 구형함으로 분류되었다.(심지어는 드레드노트보다 나중에 개발된 전함들도 pre-dreadnought가 되어서 구닥다리 배 취급을 받았다.)

영국, 미국, 일본, 독일은 일제히 건함경쟁에 돌입하여 이 비싼 물건을 줄줄이 찍어내게 되었고 이것은 국가제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드레드노트 자체는 이전의 전함들보다 구조적인 혁신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긴 했지만 (드레드노트 클래스 바로 전에 채용되었던 넬슨급과 비교해서) 워낙 전함이 비용이 많이 드는 무기인 관계로 이미 보어 전쟁 후유증을 앓던 영국은 예전처럼 2~3위국 해군의 해군을 압도할 수 있을만한 대규모 해군을 드레드노트 급 전함으로 구성하는데 실패한다.

이제 영국해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일제국의 추격이었다. 이미 세계 2위의 해운국가로 급부상한 독일은 항로의 유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철부지 황제 빌헬름 2세의 개인적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무서운 기세로 전함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20세기의 여명기에 세계의 강대국들은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건함경쟁에 돌입했으며 전함의 발달은 대함거포주의의 전성기에 돌입했다.

The "Super Dreadnoughts"

S Dreadnought Orion Class

수퍼 드레드노트 급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가 사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보통은 영국의 오리온 급이나 독일의 쾨니히스 급이 수퍼 드레드노트 전함의 원조로 꼽힌다. 드레드노트가 건조된지 불과 4년뒤에 제조된 오리온 급은 배수량이 2000톤 정도 증가되고 13.5인치 포를 주무장으로 하고 있으며 중요부위에 장갑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또, 함교의 시야를 개선하고 포탑을 단계적으로 배치해서 중심축선 상으로 동시발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드레드노트, 수퍼 드레드노트급 전함들로 구성된 영국의 대함대와 독일의 대양함대는 1890년대부터 신경전을 벌였고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 이를 갈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전함들은 한번의 교전에서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들이라서 서로 눈치만 볼 수 밖에 없었다.

Grand Fleet

주요 전투들은 순양전함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고 독일의 순양작전들은 현대의 해적들처럼 온갖 활극을 벌이고 다녔죠. 엠덴호 같은 경우는 워낙 극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양쪽의 주력 해군은 자신들의 기지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영국은 15척이나 그 이상 정도 꾸준히 독일해군에게 드레드노트 함의 수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독일함대를 무시할 만큼의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독일의 해군대신 틸피츠가 건설한 대해함대는 몇번의 신경전을 거쳐서 드디어, 숙적 영국해군과 유틀란트에서 격돌하였다. 유틀란트 해전은 전함들의 해전으로는 세계 최대규모 급의 대해전이었지만 전쟁에 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독일해군은 14척의 영국전함을 침몰시켜서 12척을 잃은 손실에 비교해보면 전술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영국의 봉쇄망을 완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므로 결국은 영국해군의 전략적 승리로 굳어진 것이다.

유틀란트 해전은 새로운 전함건조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 원거리 포격에 의한 대낙각탄 방어를 위해서 갑판에도 강력한 방어가 필요하다.
- 어뢰공격의 위험이 현실화 되었기 때문에 수면하 방어를 강화해야 하고 벌지를 추가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런 것들이 반영된 전함들은 포스트 유틀란트 전함으로 부른다.

  1. 미해군의 버지니아 급처럼 실험적으로 전부 8인치 포만을 장비하였던 녀석들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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