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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의 역사 : 1. 여명

1. 프로축구, 그 화려한 서막

한국의 1980년대는 3S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고 프로축구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의 여가선용 기회 마련을 위해서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프로화 계획이 시작되었지만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길이 문제였다. 당시 야구협회 회장이었던 임광정 씨는 야구 프로화에 36억이 필요하다고 보고했고 축구협회 회장인 최순영 씨는 축구 프로화에 139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당시에 이렇게 막대한 돈을 끌어올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우병규 씨와 고등학교 동기라는 연줄이 있던 MBC의 해설위원출신 이호헌 씨가 기업들에게 야구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도록 하자는 방안을 마련했고 이 묘안을 통해서 프로야구는 불과 6개월만에 출범해서 80년대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떠오른다.

축구계도 그에 뒤질세라 1983년 5월 8일 수퍼리그(당시 2년 먼저 출범한 실업축구가 코리안 리그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K리그가 될 수 없었다.)라는 이름으로 프로2개팀(할렐루야, 유공)과 실업3강(대우 포철 국민은행)으로 프로리그를 시작했다.

할렐루야 독수리 팀은 경기-강원-충청 지역을 연고지로 했고 유공 코끼리 팀은 서울을, 포철 돌고래 팀은 경북-대구를 연고지로 했으며 대우 로얄즈는 부산-경남을, 국민은행 까치 팀은 호남을 연고지로 시작했다. 이런 광역연고제 하에서는 연고지 개념이 희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저가 공세와 초기 효과 덕분에 1983년 한국 프로축구는 유료 입장객 2만이라는 엄청난 관중 동원력을 보이며 화려하게 출범했다.

국내 프로스포츠팀 1호로 이미 홍성호, 황정연, 최종덕 등 국가대표급 수비진을 갖추고 있던 할렐루야가 제도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는 대우와 현대 럭키금성이 각기 프로팀을 창단하는 등 프로축구의 출발은 화려했다.

2. 국가대표팀의 그늘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 88년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축구공화국에서 유독 프로축구만은 급격하게 초기의 열의를 잃어갔다.

축구발전을 위해서 리그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가의 위상을 드높여야한다는 논리앞에 기를 펴지 못했고 대표급 선수들이 줄줄이 차출되면서 월드컵 예선전에는 8만 관중이 모였는데 프로축구 관중수는 원년에 20,924명에서 84년 9,167명, 85년에는 겨우 5,393명으로 직하강했다.

85년에 수퍼리그는 우승팀 럭키금성 외에 포철, 대우, 현대, 유공, 상무, 한일은행, 할렐루야 8개팀이 모인 프로-세미프로 리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든 팀을 프로화 시키겠다는 야심찬 발전방안하고는 정반대로 원년 우승팀 할렐루야가 성적부진을 이유로 해체 선언해 버리면서 연고지 의식 부재로 인한 떠돌이 경기 등등 온갖 악재가 겹치며 라이벌인 프로야구에 완전히 뒤쳐지게 되었다.

1987년, 월드컵 진출로 인한 축구 열기도 잦아지면서 한국 프로축구는 완전프로화, 지역연고제 도입, 리그 독립채산제 등등 보다 근본적인 면을 수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대우, 포철, 유공, 현대, 럭키금성 등이 모처럼 대표팀 소집에서 해제된 스타급 선수들을 전부 내놓으며 열띤 경쟁을 벌이며 진정한 프로축구 시대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이 해에 터진 김종부 스카우트 파문은 한국프로축구에 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몇가지 쟁점을 가져온다.

3. 김종부 파동

1986년 봄 고려대 4학년 생으로 폭격기라는 별명이 있던 아마 최대어 김종부를 놓고 현대, 대우, 럭키금성이 치열한 영입경쟁을 벌였다. 특히 자동차 라이벌인 현대와 대우의 경쟁이 엄청났는데 당시 현대는 계약금 1억 5천에 연봉 2,400만, 졸업까지 매달 장학금 지급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면서 김종부 영입에 성공했지만 이 계약은 불과 12일 만에 김종부 본인에 의해서 번복된다.

'현대와의 입단계약은 학교의 권유에 의해서 이루어진 억지 계약이다'라는 주장에 현대는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겠다고 을렀고 결국 고려대는 김종부를 축구부에서 제명했으며 축구협회도 그의 선수자격을 박탈시켜 버렸으나 당시에는 월드컵이 코앞이라 대표팀의 김정남 감독의 간청으로 일단 김종부의 선수자격은 복권되었다. 하지만 1987년 11월 축구협회가 고려대를 졸업한 김종부에게 다른 팀을 선택할 길을 열어주자 현대는 11월 7일, 돌연 팀 해체를 선언해 버린다.

결국 50여일에 걸친 '2차 김종부 파동'은 축구협회 최순영 협회장이 사퇴하고 김종부는 포항에 임대되는 형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프로축구계는 각팀의 과열 스카우트 경쟁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드래프트 제를 채택하게 되었으며 이는 나중까지도 클럽팀의 유소년 육성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미 한국프로축구는 훗날까지도 골치거리가 될 연고지 문제, 심판 자질 문제, 빈번하게 바뀌는 제도 등 모든 혼란의 싹을 갖고 화려한 여명이 시작되자 마자 끝모를 진흙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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