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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AAR] EU3 France 프랑스는 Europa Universalis에서 언제나 주연급이었지만 EU3에서는 완전히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시작할때 부터 안정적인 경제력과 무엇보다 압도적인 맨파워, 리더들의 실력으로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를 물리치기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면에서 압도적이죠.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과제도 명확합니다. 첫째, 프랑스를 통일하고, 둘째, 식민지를 확장한다. 일단 시작해보면, 영국과 전쟁중입니다.(IN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지 않지만 영국을 공격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통일에 장애가 될 세력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첫째, 잉글랜드(England), 둘째, 브루군드(Burgund), 셋째, 브리트니(Brittany) 잉글랜드와 싸우게 된다면 우선.. 더보기
1차 중동전과 팔레스타인 난민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70만 내지 75만명의 아랍계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주변국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이를 둘러싼 문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역사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과 상황은 오늘날까지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모든 분파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1951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를 이스라엘 국외에 711,000명, 이스라엘 국내에 16만명 정도로 추산했으며 오늘날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4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에 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초창기에는 ‘주변 국가의 명령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이 1차 중동전쟁 이전에 전투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려 .. 더보기
중동전쟁과 유대 난민 추방의 진행과 이유 기원전 6세기 경의 바빌론 유수 이후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랍 각지에 흩어져서 수천년을 지내왔다. 유럽의 기독교 사회보다 비교적 유대교에 관대했던 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살아왔지만 19세기 말 중동에 유입된 민족주의는 아랍과 유대인의 관계를 근본적인 부분에서 바꾸어 놓았다.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예멘 출신의 유대인 중 약 10%가 1881년부터 1914년 동안에 이주했던 것 처럼 20세기 이전에도 박해를 피해 이주한 경우가 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격화된 아랍의 민족주의는 중동각지에서 유대인 박해를 가속화시켰고 유대인의 이주는 급격히 가속되었다. 그와 함께 시오니즘의 이상이 구현화 되면서 유대인들은 아랍국가에서 소수자로 지내는 불안정한 삶 .. 더보기
갤리 6. 갤리선 시대의 종말 건현이 높은 범선들은 언제나 갤리선의 만만치 않은 맞수였고 삼각돛과 사각돛을 조합한 전장범선이 발달하고 대포의 위력이 증가하자 갤리선은 황혼을 맞이했다. 하지만 갤리의 황혼기는 대포가 개발되기 전부터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1034년 덴마크의 무역 선단은 비용과 효과의 문제로 호위선을 갤리선에서 코그선으로 교체했다. 파고가 높은 북해에서 갤리선은 빠르게 범선으로 대체되었지만 잔잔하고 풍향이 일정치 않은 내해인 지중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지중해에서 갤리선은 1595년~1605년 부터 활용도가 줄었지만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만들어진 범선이 상업교역로에 유입되기 시작한 17~18세기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새로 도입된 전장범선들은 보다 많은 화기를 장치할 수 있었고 항해성능도 뛰어나 해적의 .. 더보기
갤리 5. 중세의 갤리 중세시대 지중해를 둘러싼 단일 문화권을 형성한 로마는 해적을 포함해 항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제거했지만 서로마가 멸망하고 북아프리카와 유럽간의 교역이 단절되면서 중세 유럽의 항해문화는 답보상태에 놓였고 부분적으로는 퇴보했다. 중세 중기 이후에 가장 활발한 활약을 벌인 해양세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유럽 계 바이킹으로 이들은 북유럽 연안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내륙부나 지중해, 심지어는 아랍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유럽의 해양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세 유럽의 가장 오래된 갤리선 설계도는 시실리아의 카를 1세의 명에 의해 1275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약 40m에 홀수 2m, 넓이 3.6m에 달하는 이 갤리선에는 길이 6m의 노가 약 108개 있고 전체 중량은 80톤 정.. 더보기
전열함 -2 이렇게 모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몇몇은 설계를 변경했으며 영국해군은 일부 74~64문 장비 전열함의 상부 갑판을 제거해서 ‘래지’라고 불리는 전열함과 프리깃의 중간급에 해당하는 선박을 만들었다. 이들은 분류상으로는 프리깃이었지만 성능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소설 혼블로우의 주인공이 사관생도 시절에 근무하던 선박인 에드워드 펠로우 경의 HMS 인디패티거블도 ‘래지’에 해당한다. 전열함은 후기로 갈수록 점차 대형화 되어 크림전쟁에서는 그때까지의 상식을 초월하는 대형 전열함들도 선을 보였다. 1829년 진수된 마흐무디예 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지시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을 만들라는 명령에 따라 3층 갑판에 128문의 대포를 장비한 초대형 전열함으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에서 위력을 자랑했다..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 더보기
리뷰 : 해상시계 해상시계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교양우주 > 교양지구과학 지은이 데이바 소벨 (생각의나무, 2005년) 상세보기 2천년 전, 에라토스테네스는 지표면의 각 지점들을 좌표로 표시할 수 있도록 지도에 경도와 위도를 도입했다. 좌표계를 통해 우리는 이론적으로 지구상의 특정 지점을 표시하고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300년 전까지도 인류는 흔들리는 배위에서는 자신이 있는 지점의 경도를 알아낼 수 없었다. 지상에서라면 천문현상을 정밀하게 관찰해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지만 원거리 항해를 하는 사람이 흔들리는 배위에서 정밀한 관측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시대의 탐험가가 경도를 모른다는 것은 눈을 감고 고속도로에서 한밤중에 조깅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고, 때문에 수많은 해난사고가 .. 더보기
리뷰 : 러일전쟁사 러일전쟁사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로스뚜노프 외 전사연구소 (건국대학교출판부, 2004년) 상세보기 100여년 전의 러일전쟁은 이후 반세기에 걸쳐서 한국과 일본, 러시아의 운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청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동북아지역에서 막아낼 대항마로 선정된 일본은 개항 이후에 축적한 역량을 모두 발휘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내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였고 러시아는 흑해, 중앙아시아에 이어 다시금 아시아에서 부동항 획득과 이사이 지역으로의 진출에 실패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의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또 우리 나라는 그동아나 유지해오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그때까지 일본이 이익선 내에 우리나라를 보존하는데 만족하던 것을 떠나 본격적으로 침략 야욕을 보임으로써 주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결정적.. 더보기
리뷰 :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전쟁과과학그야합의역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국방/군사 > 국방/군사일반 지은이 어니스트 볼크먼 (이마고, 2003년) 상세보기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물질과 정신의 비율이 1:3이라고 말했지만 그 뒤에 일어난 전쟁들은 물량이 정신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과 전쟁이 결탁하면서 가속화된 전쟁과 과학의 결합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쳐 핵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낳기에 이르러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걸프전은 과학이 오늘날 전쟁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의 관점을 통해 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오늘날의 대세이고, 전쟁사를 특정한 관점을 통해 조망하려는 시도 중에서도 이 책은 추세에 맞추어 과학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전쟁을.. 더보기
제1차 인티파타 1987년 오슬로 합의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설립된 이후부터 1993년 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폭력사건의 총칭. 투석 투쟁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인티파타라고 하면 제1차 인티파타를 의미하며 1차 인티파타라고 부르게 된 것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알 아크사 인티파타를 제2차 인티파타로 부르게 된 다음부터이다. 경위 발단 1987년 10월 1일,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의 가자출신 구성원 7명을 매복 사살하고 며칠 뒤에는 이스라엘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을 배후에서 총격하고 이에 대해 12월 4일에는 슈로모 사칼이라는 이스라엘 세일즈맨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스라엘 국방군의 트럭이 자동차에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고로.. 더보기
오슬로 협약 이후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드리드의 이정표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제1협약 : 실패가 예언된 원칙 선언 : 미국과 러시아가 후원한 이스라엘과 PLO 간의 비밀 노르웨이 협약에 의함. 2년의 기한을 두고 자치정부를 구성 1994년 5월 4일 - 가자와 예리고를 우선으로 하는 카이로 합의 :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5년 기한의 전환 작업이 시작됨. 1995년 9월 28일 - 오슬로 제2협약 : 준비협약으로 A, B, C 지역으로 세분화된 지역에서 최종 협약 타결을 위한 준비기간 1996년 1월 -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당선됨 1996년 5월 - 항구적 평화합의를 위한 기념할만한 출발 - 이스라엘 선거로 실질적 협상이 지연됨 1991년 4월 1.. 더보기
파시즘과 정치스펙트럼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는 정치 스펙트럼에서 파시즘의 위치는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없다. 파시즘 우익설 파시즘은 사상적으로 계급투쟁 보다는 계급간의 협력을 선호하며 국제주의보다 국가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1932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철학자 지오바니 젠틸(Giovanni Gentile)은 파시즘이 집단적이고 우익적인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가 사회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세기였다고 해서 20세기에도 이념분포가 그와 같은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존재하지만 정치적 이념은 변화한다. 우리는 20세기가 권위의 세기이며 우익화되는 성향이 있는 파시스트의 세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19세기가 개인주의의 세기였다면(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포함한다.) 우리는 20세기가 집단의 세기,.. 더보기
이스라엘이 바라본 중동분쟁 UN 1947년 분리독립안 1947년 11월 29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2/3의 찬성으로 유대와 아랍의 분할독립안을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지도상의 푸른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유대인에게 배정된 지역의 75%는 사막이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한 천국은 아닐지라도 유대인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분리안을 받아들인다. 반면 아랍은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유대인 국가도 수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분리독립안을 거절한다.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예맨 등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했고 결의안이 무효라고 선언한다. 1948년 아랍침공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다음날 아랍연합 총장 아잠 파샤는 성전.. 더보기
코그 Cog 코그선은 10세기부터 등장해서 12세기 무렵에 발트 해 주변의 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선박이다. 발트해 연안에서 풍부한 목재인 떡갈나무로 건조되었고 보통은 마스트 1개에 가로돛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가로돛만 장비한 선박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항해하기가 어렵지만 운항에 필요한 승무원의 수가 적으므로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1380년의 코그선 구조 코그선의 구조는 중간부에서는 평평한 구조의 평저선 선저에서 선수와 선미 부분으로 갈수록 잇대어 이어진 외판을 덧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선의 밑부분은 통칭 빌지(배 밑바닥에 침수되는 물을 모아둔 부위)에 외판을 덧대어가는 구조로 판은 쇠못을 양단으로 굽혀서 고정한다. 용골은 지중해의 카벨 빌드와는 달리 측면판보다 약간 두터울 뿐인 클링커 빌드로 이.. 더보기
안네의 일기 ; 진위논쟁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조숙한 소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키티라는 제3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표현 스타일에 있다. 나찌 치하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은 모종의 두려움으로 표현될 뿐 생활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극장의 우상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안네는 그런 삶에서도 희망의 끈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안네의 일기는 최종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암스테르담 주둔 보안경찰 SD에 발각되고 은신처의 8명중 7명은 각기 다른 수용소에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 뿐이었다. 보안경찰이 은신처를 수색한 뒤 마루 위에 흩어져 있던 문서들을 모아두었던 협조자들은.. 더보기
경제만 살린다면 나찌는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로 왔다. 그렇게 되자 나서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 Martin Niemoelle 역사는 되풀이 된다. 사람들이 기억하려 하지 않기에. 서두의 시는 5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에만 국한되는 일이었을까? 50년뒤에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날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며 어떻게 말할까. 더보기
독일의 전후배상 "우리는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독일과 적대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마음이 아프더라도 되새기고 청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 화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뼈아픔은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1985년 5월 8일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제2차대전 40주년 기념연설 같은 해 일본의 나카소네 수상은 '.. 더보기
레바논 내전 7. 출구없는 미로 전쟁은 도박과 같아서 시작하기는 쉬운데 그만두기가 힘들다. 이스라엘은 PLO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으며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군비를 확충하고 있음을 전재로 전쟁을 시작했고, 시리아와 PLO가 레바논에서 축출되면서 물러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어떻게 전쟁을 끝내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계획했던 종전 작업은 레바논에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레바논 군을 재조직하여 시리아와 PLO? 세력을 몰아낸다면 리쿠드 당이 약속했던 40년간의 평화도 멀지 않을듯 했다. 바시르 제마엘. 팔랑헤당의 창립자인 피에르 제마엘.. 더보기
레바논 내전 6.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은 최신예 메르카바가 시리아군 T-72를 압도한데 힘입어 다시금 기갑부대간의 교전에서 승리를 장식했다. 이스라엘의 자국산 최신예 메르카바가 환상의 무적전차로 알려져 있던 소련의 T-72를 승무원 손실없이 제압해버리자?시리아 군은 더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메르카바는 히브리어로 전차(Chariot)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자국설계, 자국생산 전차인 메르카바는 두터운 전면장갑을 바탕으로 높은 생존성을 자랑하며 굴곡이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자국지형에 맞게 설계되었다. T-72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이미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군은 결국 11월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아랍세계에서 고립된채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벌이게 될 상황이.. 더보기
유대인 절멸의 문서적 근거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절멸 명령’을 기록한 문서는 발견된 적은 없고, 대부분의 경우에 유대인을 절멸시키라는 것보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조치”, “궁극적 해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 내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찌 독일에서 행해진 수많은 발언들 중에는 그러한 절멸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며 1939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독일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는 그러한 “절멸 의도”에 대한 증거로서 자주 인용된다. ”만약 국제 유대인 자본이 독일 제국을 다시 세계전쟁에 빠트린다면 그 결과는 지구의 볼셰비키화나 거기에 따른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5. 베카 계곡의 공중전 6월 9일, 시리아와 PLO는 전진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을 레바논 중부의 방어 거점에서 저지하고 있었다. 자동차에 탑재한 Sagger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스라엘도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ATM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격렬한 지상전을 거듭하면서도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의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이 시점까지 아직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전면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지난 전쟁에서 맹위를 떨치며 이스라엘 공군을 괴롭혔던 시리아군 SAM과의 2라운.. 더보기
레바논 내전 4. 작전명 갈릴리의 평화 1982년 PLO는 병력 15,000명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000여명이 남부 레바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기동중인 이스라엘 전차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차호에 은폐되어 있었다. 또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츄사 방사포 80문 및 120mm~ 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 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무장의 속도도 밀수의 천국이 된 레바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 더보기
레바논 내전 3. 시리아와 이스라엘 레바논 정부가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남부 지역에 파타랜드라고 불리는 PLO 지배 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테러활동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PLO는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이나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해서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남레바논 및 베이루트를 공격했고 이것이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기독교 마론파 소속의 팔랑헤당이 교회에서 집회를 거행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PLO지지자들의 버스가 교회에 발포, 팔랑헤당도 이에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하여 내전이 재개되었다. 또 같은 시기 남부의 시돈에서도 수니파의 어민이 .. 더보기
홀로코스트 부인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주류 역사계에서 논하는 홀로코스트, 이른바 2차대전중 나찌 독일에 의해 발생한 유대인 제노사이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사실 관계의 불명확 또는 의심스러움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재를 의문시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부인론 측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용하는 용어이며 부인론자 측에서는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증거나 확립된 방법론을 이용한 역사연구가 아니라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의 수정주의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현재의 주류적 견해는 유대인의 음모에 의한 것이며 이 음모는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2. 국가속의 국가 PLO 1960년대 아랍권은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사건(1956)으로 나세르 주의가 열풍처럼 휩쓸고 있었고 이것이 인구 변화와 함께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런 와중에 1958년 기독교 출신의 샤문(Camille Chamoun)?대통령이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하는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인자 이슬람 세력이 반발했다. 게다가 샤문 대통령이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한 채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임하려?하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규모?반란을 일으켰으며 1개월 후 반란은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샤문 대통령 ? 내전이 악화되자 샤.. 더보기
레바논 내전 1. 백향목의 레바논 비록 그 날개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입힐 지라도. ?- 칼린 지브난 오늘날의 레바논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 지역을 통치한 두르즈파의 파할 앗디가 지배하던 “소 레바논” 지역을 근거지로 한다.아랍의 일부지만 마론파 기독교도를 비롯해서 그리스 정교들이 다수 존재하는 독특한 사정으로 반독립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던 이 지역에서?1860년 오스만이 지배권을 강화하는 와중에 마론파 그리스도 교도들과 드루즈파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마론파 1만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보내 질서를 회복했다. 이후 프랑스는 레바논의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여 이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했다.?오스만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자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레바논 사회는 유럽과 교류를 쌓았으며 해외에서 축적한 부를 환원하여.. 더보기
카타리나 에란초의 모델 대항해시대2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1편과 달리 주인공이 여러명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서로 조금씩 연관되어 있다는 점인데 에스파냐 편의 주인공 카타리나 에란쵸는 시리즈 최초의 "여주인공"이었습니다. "카타리나 에란초의 기구한 모험은 평화롭던 어느날 이웃나라인 페레로 가의 기를 게양한 선박이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 오빠 미구엘과 애인 에르난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시작됩니다. 그 복수를 위해 카타리나는 에스파냐의 최신예 갤리온 선을 훔쳐내고 동료인 프랑코 사누드와 해적이 됩니다. 원한을 갚기위한 긴 모험중에 에란쵸는 조안 페레로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무언가 이상한 점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 얼굴로 18세! 서양인들은 확실히 일찍 나이든다지만... 그보다 중위에다가 .. 더보기
2차대전에서 유대인 희생자의 수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600만명에 이른다는 주장은 1945년 뉘른베르크에서 제국보안국 소속의 빌헬름 회틀의 증언, 즉, 1944년 8월말 부다페스트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때까지 살해된 유대인 수가 600만에 달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회틀은 이 가운데 400만은 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 200만은 소련에서 총살되었다고 기억했으며 뉘른베르크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1946년 9월의 선고 공판에서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명이라고 밝혔다. 반제회담에서 추정한 유럽의 유대인 수. 총 1천1백만으로 산정하고 있다. 당시에는 희생자 수가 600만인 근거를 명확히 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라이틀링어는 1945년 뉘른베르크에 제출.. 더보기
대항해시대 4. Porto Estado 1999년작. 그래픽 적인 면을 보강하고 3편의 사실성 위주에서 게임성 위주로 회귀하면서 캐릭터성을 대폭 늘렸다. 또 대항해시대 초기의 주도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북유럽 국가들이나 비유럽 국가들을 전면으로 내세우려 노력한 것이 특징적이고, 일본게임 치고는 비교적 우리나라 정서를 의식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인공 초기에는 선택 가능한 주인공은 3명 뿐이지만 클리어 하면 새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pk판에서 추가된 주인공도 있음. 플레이어가 선택하지 않은 주인공은 기존세력으로 게임에 등장하지만 대부분 군소집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근해 교역으로 만족하고 있다.(마리아나 웃딘은 예외) 라파엘 카스톨 포르투갈인. 리스본의 명가 카스톨가의 후계자로 친구인 클라우디오와 배를 보던 중에 항해를 결심한다. 초심자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