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World War

WASP, 2차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여성비행사 들

아르미셸 2008. 3. 24. 04:13

엘리자베스 L. 가드너. B-26에서

Image:Cochrane with Yeager.jpg

척 예거와 대화중인 재키 코크랜

로널드 덜 이 고안하고 그림은 무려 월트 디즈니가 그린 WASP의 마스코트, 휘휘넬라. 여자그렘린.

2차대전 기간중에 여성의 진출은 굉장히 활발한 편으로 영국에서는 여자들이 보조요원으로 열심히 근무했었고, 소련은 특별히 여군을 많이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은 전쟁 최후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나찌즘 적인 발상으로 여자를 군대에 동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WASP. Women Airforce Service Pilots는 미군의 여성 비행사들로 구성된 부대로 소련의 유명한 밤의 마녀 비행대와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2차대전에 미국 여성들도 활약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WASP는 Women’s Flying Training Detachment (WFTD)와 Women's Auxiliary Ferrying Squadron (WAFS)을 통합한 부대로 민간인 중에서 여성 항공기 조종사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아예 전선에 나갔던 건 아니지만 후방의 공장에서 갓 조립한 비행기를 배에 태우기 위하여 집적 장소까지 비행한다던지 하는 일이 꽤 많이 있었으며 그 분야에 여성 조종사들을 투입해서 남자 조종사들을 바로 전장에 보낼 수 있게 하자는 게 이 부대의 설립 목적이었다. 아무튼, WFTD와 WAFS는 1943년 중반에 통합해서 군사적인 WASP로 조직되었다.

1. Creation of the WASP

1941년 여름쯤에, 유명한 여성비행기 조종사 재클린 "재키" 코크란과 테스트 파일럿 낸시 하니스 러브 라는 두 여성이 별개로 여성 조종사들이 미육군 항공대에서 비 전투 임무분야에 종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을 했다. 기본적인 청원의 동기는 여성 조종사들을 육군 항공대의 비전투 임무에 투입하면 그 만큼의 남자 조종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수 있는데다가 비행기를 조종할 줄 아는 여성 조종사들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자들도 비행기를 공장에서 출발시켜 군기지까지 옮기는 정도의 비전투 임무는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런데, 당시 육군 항공대의 수장으로 보수적인 성격이었던 헨리 H "햅" 아놀드 장군은 이 제안들을 전부 거절했다. ("아가씨는 남자가 털양말을 뜨게질 하거나 여자가 트럭운전수를 하는 걸 본적이 있나?"라고 대답했다.) 아놀드 장군은 러브의 1940년 제안을 거절했고 코크랜이 여장부로 소문난 엘레노어 루즈벨트(FDR 마늘님)를 통해서 로비를 거쳐서 1941년 제안한 것도 여전히 거절했다.

1차대전에 그랬듯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어찌되었건 미국은 아직 전쟁의 중심에 있던 것은 아니었던 거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듯 하지 않자 코크랜은 영국에 건너갔고 Air Transport Auxiliary(ATA)에 자원했다. 여기에 자원했던 사람들 중에 미국인 여성들은 최초로 군사비행 임무를 수행했던 미국인 여성으로 개중에는 스핏파이어, 타이푼,허드슨, 미첼, 블레님, 옥스포드 같은 일선용 무기들을 비전투 임무에서 사용한 적도 있었으며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계속 ATAT에 있었고 3명이 돌아와서 미국의 WASP에 참여했다.

2. 진주만 이후.

진주만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급속도로 군대를 확장하기 시작한 미군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역시 훈련된 인력으로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을 총쥐어주고 군인으로 만드는 거야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갑자기 비행기를 주고 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육군항공대의 수송단(Army Air Force Air Transport Command = ATC)의 윌리엄 H 터너 사령관이 당시 ATC에서 민간지원 나가고 있던 러브 양한테 감명을 받았던지 아놀드 장군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여성 비행사들로 수송 집단을 운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러브"를 지휘관으로 하는 WAFS가 1942년 9월에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한편, 1942년 여름에 인력부족을 절감하게 된 미육군 항공대는 코크랜의 여성 시민 자원조종사를 되새기고, 그에 관해서 확인하던 중에 윌리엄 H 터너 장군이 이미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터너는 이미 수십명의 여자들을 비행기를 공장에서 비행장까지 옮기는 데 활용하고 있었고, 전쟁 전에 "말썽장이" 코크랜을 영국으로 보내버렸던 헨리 아놀드 장군도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느낀 모양인지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리하여 미국 최초의 여군 비행대가 코크랜과 러브의 두 선구자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설립되었다.

WFTD는 지금의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Municipal 비행장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WAFS는 델라웨어의 뉴카슬 육군비행장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며 1943년 8월에 두 부대가 WASP로 통합되었다.

3. Duties of the WASP

디니 페리쉬, 플로리다의 육군비행장에 도착시킨 P-47 앞에서 1940년대 초.

플로린 왓슨이 자신의 P-51을 예열시키고 있다.

Image:020927-o-9999A-002.jpg

록본의 중폭격기 비행교실에서 B-17플라잉 포트리스를 조종하고 난 다음에 찍은 사진

미국 전역에서 1,830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자가용으로, 버스로, 히치하이킹으로,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가정을 떠나서 텍사스로 몰려들었다. 국가가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하늘을 나는 것을 사랑했으며 자신들도 전쟁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자원한 사람들은 미 육군 항공대에서 군사교육을 속성으로 받고 몇달 동안 군사 비행훈련을 받았으며 지원자 중, 1,078명이 남아서 WASP 부대를 구성했고 미국전역에 있는 약 120개의 비행장에 흩어져서 남자들이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9천만km이상을 날라다니며 수송임무 등에 종사했다. 1942년 9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WASP는 12,650기의 항공기를 78개의 다른 장소에 전달했으며 2차대전 기간 중에 미국 내에서 운반된 비행기의 50%이상을 WASP가 운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와중에 38명의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당시의 기준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명예로운 전사자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WASP는 민간인 지원자였지만 남자들이 받은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여자들이 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게 거북스러웠던 여론에도 밀려서, 1944년 12월 20일 미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햅" 아놀드 장군은 스위트 워터의 어벤저 필드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WASP 는 임무를 완수했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중에 일어난 비일상적인 사건이었으며 우리는 그 대가로 38명이 국가의 승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공군은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WASP의 해체를 결정했다.

WASP에 관한 기록은 향후 35년간 봉인되어 버렸고 그들의 전쟁수행에 기여한 노력들은 오랜 동안 외면당하고 있었으나 1975년 햅 아놀드 장군의 아들, 브루스 아놀드 대령이 중심이 되어 관련 자료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지원하에 명예회복을 신청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마침내 WASP 부대가 전쟁중에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했음을 인정하고 1984년에 모든 WASP 구성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며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수상자의 아들 딸들이 대신 수상하게 되었다.

Image:Jackiewasptrainees.jpg

진의 중앙에 있는 사람이 재키 코크랜

셜리 슬레이드. 라이프 지에 나온 사진.

Quotes

"지금은 여자들이 인내하기만 할 시기가 아니다. 우리는 전쟁중이고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싸워야 한다. 여성파일롯들 또한 우리가 사용하려고 하는 인원중 하나다"

1942년, 엘레노어 루즈벨트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대로 진행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도록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1,078명의 여성 조종사들이 2차기간 중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넬 엔더슨 벌첵, WASP

http://en.wikipedia.org/wiki/Women_Airforce_Service_Pil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