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남부전선
1914년 10월 8월에 맺어진 독일과의 동맹 밀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동맹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코카서스 영토를 위협하는 동시에 수에즈 운하를 차단하여 영국-인도간의 육상 연락로를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1915년 갈리폴리와 메소포타미아에 새로운 전선을 확장한다. 갈리폴리에서 투르크 군은 영국-프랑스-안잭(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군의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쿠트 포위(1915~1916)에 실패하여 영국군에게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뺏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다 서쪽의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영국군은 초기의 실패를 극복하고 1917.12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에드문트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군을 1918년 9월 메기도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안잭군 마크. 위는 오스트레일리아군 아래는 뉴질랜드군.
엔버 파샤. 야심은 큰데 능력이 안되는 양아치.
중앙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에 불타던 터키군 최고사령관 엔버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군을 맞아 러시아 군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훌륭한 작전을 펼쳤다. 엔버 파샤는 야망에 비해서 군사적인 재능이 부족했으며 1914년 12월 코카서스에서 10만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했으나 한겨울에 산악지역에 방어선을 펼친 러시아 군에게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 86%의 병력을 살리카미스 전투에서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다.
니콜라이 유데니히 장군
니콜라이 대공
1915~1916동안 유데니히 장군이 지휘한 러시아 군은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연전연승을 거두어 코카서스 남부에서 몰아내었으며 1917년 니콜라이 대공이 코카서스 전역의 상급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러시아의 게오르기아 방면에서 정복지까지 철도를 부설하여 보다 공세적인 작전으로 전환할 준비를 했지만 1917년 3월(러시아 달력으로는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전복되자 러시아 군도 천천히 붕괴되었다.
이탈리아의 참전
이탈리아는 1882년 이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그런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트렌티노,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 영토에 욕심이 있었고 1902년 프랑스와의 밀약을 맺어두었기에 동맹관계에서 크게 구애되지는 않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요구에 대하여 '방위 동맹'이지 공수 동맹이 아니었음을 이유로 참전을 거절했고 튀니지의 프랑스 영토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이탈리아를 회유하려던 오스트리아 와의 협상이 실패하자 이탈리아는 1915년 4월 런던 조약을 승인하고 1915년 5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했다.(15개월 후에 독일에게도 선전포고)
일반적으로, 이탈리아는 수적인 면에서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1917년 영국과 프랑스가 포병 전력을 지원해줄 때까지는 루이제 카도르나 장군에 의한 이론조 전선의 공세에서 그 이점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군 사령관 카도르나는 적 전선을 돌파하여 슬로베니아 고원으로 진격하여 루블리아나를 점령하고 비엔나를 위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방어되는 참호전의 실상을 도외시 하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알피니 부대
카도르나 장군은 아군 병력의 희생을 도외시 하고 연합군의 다른 전역에서의 압박을 덜어주고 목표로 하는 지역을 점려하고자 맹렬한 공세를 펼쳤으나 트렌티노 전선에서 산악지형의 이점을 살린 오스트리아 군의 순차적인 후퇴전략에 휘말려 피해만 누적되고 전선의 고착상태를 타개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Kaiserschutzen와 Standschutzen과 이탈리아의 Alpini 부대는 여름 내내 육박전을 벌이고, 겨울에는 고원지대에서 생존을 위해 격전을 벌였고 1916년 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아시아고 고원에서 베로나와 파두아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큰 소득은 없었다.
1915년 초부터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북부의 이손조 강 유역에서 이손조 전투라고 불리게 된 11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며 결국 고지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격퇴당했다. 1916년 여름, 이탈리아는 고리지아를 점령하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탈리아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고착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1917년 동부 전선의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독일 돌격사단을 포함한 대규모 증원병력을 남부 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 부터 동맹군은 독일군을 선봉으로 하여 돌파작전을 시도했으며 카포레토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 군은 100km를 후퇴한 끝에 후방의 피에브 강에 이르러 부대를 재조직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 군은 아시아고 고원의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결국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11월 항복했다.
발칸 전역
러시아 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병력을 돌려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자국군의 1/3이상을 동원할 수 없었다.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일시적으로 세르비아의 수도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반격으로 1914년 말까지 대부분의 점령지역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15년 10월까지 오스트리아는 대 이탈리아 전선에도 많은 병력을 할애했던 관계로 수세에 몰렸지만 불가리아를 동맹군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오스트리아 령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적극적인 지원을 유지한 관계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전선은 지리한 대치국면에 돌입했지만 1917년 러시아 전선이 정리되자 10월 7일,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증원된 병력으로 북부에서 공세를 시작하였으며 4일 뒤 불가리아가 동쪽에서 양면전을 펼쳐나가자 결국 세르비아 군은 코소보의 질란 근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도브로 폴 전투.
1915년 말, 프랑스-영국의 연합군이 그리스의 살로니카에 상륙하고 그리스 정부에 연합군측에서 참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독일계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틴 1세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연합국에 기울어진 그리스의 에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해임해 버렸다. 살로니카 전선은 완전히 고착되었으며 동맹국들은 농담삼아 살로니카는 독일의 최대규모 포로수용소라고 놀리곤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동맹군 병력 대부분이 후퇴할 때까지 연합군은 발칸반도를 돌파하지 못했으며 불가리아는 도브로 폴 전투와 그에 이은 도이란 전투에서 패배할때까지 연합군을 잘 막아내었으나 동맹군에게 전반적인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1918.09.29 종전협정에 동의했다.